<中외교 시리즈> 다이빙궈, 후진타오 외교의 실세 중 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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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5-2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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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미·일 종횡무진<br/><중국외교를 움직이는 사람들 Ⅰ> 다이빙궈 上


(아주경제 강정숙 기자) 관우·유비·장비는 복숭아 과수원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했다. 중국인의 오랜 관습이자 생활이었던 '꽌시(關係·인맥)'는 이때에도 존재했다.

“친구 한 명이 늘어나면 길 하나가 생긴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맥에 의해 작동되는 중국사회에서 외교관계 역시 '꽌시'를 빼 놓고는 논할 수 없다.

한국이 대(對)중국 외교에서 고난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중국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물 ‘꽌시’를 되짚어 보지 않은데서 온 것이다.

또한 중국이 바라보는 외교를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부짠얼츠런즈빙, 샨즈산저이(不战而屈人之兵, 善之善者矣·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 중국인들이 말하는 중국외교다.

이는 손자병법 ‘모공편’에 나온 말로 진정한 승리는 곧 나도 남도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중국은 현재 경제성장을 지속해야 하는 최대의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충돌을 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환기를 맞은 중국 외교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나.

복수의 전문가들은 그동안의 한국의 대중외교에 대해 과거 우방국의 시각만으로 일관했던 편식(偏食)적 외교사(史)와 우리와 시스템이 전혀 다른 중국외교에 대한 단순한 사고와 분석의 결과라고 지적한다.

동아시아연구원은 우선 중국 외교정책에 대미관계가 더욱 중시돼 미국전문가들이 대거 중용될 것으로 보이며 후진타오 정권이 유지해온 외교정책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한반도 정세의 밑그림을 좌지우지 하는 그 블랙박스 안을 본지와 동아시아연구원(EAI) 중국연구센터가 공동으로 해부해 봤다. 

◆후진타오, '다이빙궈'를 만나다

'세기의 만남'.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워싱턴 회담에 단연 돋보였던 외교 실세는 70세의 노장,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이다.

그는 후진타오가 2002년 중국공산당 당대회 이후 강조하는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를 표방하면서도 철저히 국익에 반하는 장애물에는 거침없이 ‘뿌(不·No)’ 라고 외쳤다.

1998년 4월 26일, 중국 국가부주석에 취임한지 한달만에 후진타오는 한국을 찾았다.

당시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한국에 '후'는 "위안화 평가절하는 절대 없다. 한국을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여행자유국가로 지정하겠다"며 한국과의 특별한 외교적 '꽌시'를 맺었다. 그 때도 '후'의 뒤에는 '다이빙궈'가 있었다.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은 양제츠(杨洁篪) 외무부 부장(장관)과 역할을 분담해 정상외교를 수행하면서 미국과의 전략경제대화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전략분야 특별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이빙궈와 동시에 우리가 주시해야 할 인물에는 바로 왕자루이(王家瑞)와 류홍차이(劉洪才)가 있다.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은 당대당(黨對黨)외교를 책임지고 있다. 류훙차이 북한주재 대사도 최근까지 대외연락부 부부장으로 있었다.

후진타오가 중국 국가부주석에 취임한 4년 뒤인 2002년 10월, 다이빙궈는 16차 당대회에서 당 총서기에 선출되면서 중앙외사공작영도소조 조장을 맡게된다. 

그러나 16명으로 이뤄진 외사소조(*설명)에는 ‘후’ 사람은 없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복심인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이 실무를 담당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5년 4월, 후진타오는 장쩌민으로부터 군권을 정식으로 넘겨받는다. 후는 당시 외교부 차관이던 다이빙궈를 외사소조 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 당서기로 발탁한다.

'후진타오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중국외교 '장문인(掌門人·실력을 겸비하고 따르는 무리가 있는자)' 다이빙궈는 누구?

다이빙궈는 현재 중국의 외교담당 국무위원이면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다.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의 국가안보 제일참모인 다이빙궈 중국외교 부장은 한국과 북한 뿐만 아니라 미국·일본·러시아 등 6자회담 참가국들과도 접촉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 있은 지 나흘만인 지난해 11월 27일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특사자격으로 다이빙궈는 방한해 다음날 곧바로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한다.

이 방한은 사전 통보 없이 진행된 외교란 점을 감안해 외교상의 결례라는 오점을 남기는 동시에 긴급한 상황에 급파해 방문국의 원수를 만난 다이빙궈의 다이렉트 외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 면담 후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간 다이빙궈는 그날 저녁 클린턴 힐러리 미 국무장관과의 전화통화에서 “중국이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후 다이빙궈는 12월 9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올해 1월 11일 베이징에서 전 자민당 간사장인 가토 고이치(加藤 紘一)을 비롯한 일본의원대표단과 24일 중러 제5차 전략안보대회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해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도 면담했다. 

이에 대해 한 외교소식통은 “중국이 긴박한 상황에 다이빙궈를 급파한 것을 보면 실세중의 실세로 후진타오의 직접적 지시를 받는 인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 '김정일'이 신임하는 '다이빙궈'

다이빙궈가 중국외교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계기는 2002년 말 북한 핵 위기 때부터다.

같은 해 11월 16차 당대회를 통해 출범한 신생 후진타오 체제에게 북한의 핵문제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 과제가 됐다. 

후진타오는 2003년 3월 다이빙궈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를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외교부 당위 서기로 임명해 실질적 권한과 역할을 줬다. 

다이빙궈는 대외연락부에서 활동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만큼 적임자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다이빙궈가 대외연락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세계 각국에 총 400개 대표단을 파견하고, 800개의 해외 정당대표단을 초청 접견했다. 그리고 147개 국가와 418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중국 중앙외사영도소조란?

실제 중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기구다.

1958년에 수립된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국가와 당 차원의 외교업무를 다룬다. 기관간 주요 정책의 조정과 의사전달, 감독, 협의를 관장하는 기구다.

-아주경제 & EAI중국연구센터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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