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호르무즈 위기가 드러낸 한국의 에너지 공급망 한계와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호르무즈 위기는 과거 중동발 에너지 충격과 달리 가격 상승을 넘어 에너지와 산업원료의 물리적 조달 차질로 확산됐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석유제품 물동량은 전쟁 직후 하루 약 2000만 배럴에서 사실상 미미한 수준으로 급감했다. 카타르 LNG 공급 차질로 한국과 인도 등 아시아 수입국들이 대체 현물 물량 확보에 나서는 등 공급 차질이 산업생산으로까지 전파됐다. 원유뿐 아니라 나프타와 LNG, LPG, 황, 헬륨 등 산업원료와 해상물류 전반에서 차질이 발생하면서 가격·물량·물류 충격이 연쇄적으로 확산됐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다.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자체도 재편되고 있다. 셰일혁명 이후 미국이 원유와 LNG의 주요 생산·수출국으로 부상하면서 중동발 충격을 완충할 수 있는 새로운 공급축으로 자리 잡았다. 2025년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약 1360만 배럴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LNG 수출 역시 단일 국가 기준 세계 최대 수준에 달했다. 입법조사처는 미국의 부상을 중동을 대체하는 단일 공급자의 등장이라기보다 미국과 중동,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공급구조의 다극화로 평가했다.
한국의 문제는 공급국 숫자보다 실제 전환 가능성에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원유 공급국은 2024년 기준 18개국으로 일본보다 많지만 도입 원유가 동일한 지정학적 초크포인트를 통과하고 국내 정제설비가 특정 유종에 맞춰져 있어 위기 때 대체 공급원을 곧바로 활용하기 어렵다. 중동산 원유의 9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것도 취약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는 중동 리스크에 상시 노출돼 있다. 국내 정유공정의 나프타 수율은 약 20% 수준으로 내수 수요의 약 45%를 수입에 의존한다. 2025년 나프타 수입량의 약 77%가 중동산이며 전체 수입량의 약 54%가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했다. 나프타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플라스틱과 포장재, 자동차, 전자소재 등 전방 제조업으로 영향이 확산될 수 있다.
정유설비도 전환의 걸림돌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중동산 중질·고유황 원유를 처리하는 고도화 설비에 투자해왔기 때문에 미주산 경질·저유황 원유로 급격히 전환할 경우 잔사유 처리 설비가 유휴화되고 제품 수율 구조가 달라질 수 있다. LNG 역시 수입처는 원유보다 분산돼 있지만 액화설비와 선복, 수입터미널의 여유가 부족하면 대체 물량을 확보하기 어렵다.
입법조사처는 이에 따라 에너지 안보 정책을 수입선 다변화에서 공급망 회복탄력성 강화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핵심은 평시에 확보해두는 '완충자산'과 위기 때 다른 공급원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옵션'이다. 비축과 스와프를 상시화하고 특정 지역과 해상 초크포인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한편 장기계약에 재판매권·스와프권·증감량 옵션 등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 과제로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 등을 통한 전략 산업원료 비축체계 보완이 제시됐다. 나프타처럼 기존 의무비축 대상에서 빠져 있는 핵심 산업원료에 대해 품목별 위험도와 대체조달 가능성 등을 반영한 비축목표를 설정하고 평시 최소비축에서 위기 시 추가비축으로 전환하는 단계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조세특례제한법' 정비도 제안했다. 비중동산 원유 처리와 원료 전환 등 공급선 다변화에 직접 기여하는 기술·설비를 신성장·원천기술 및 사업화시설 범위에 제한적으로 포함해 우대 공제율을 적용하는 방안이다. 다만 단순 설비 증설이나 노후 설비 교체가 아니라 실제 유종·원료 전환 능력을 높이는 투자로 지원 대상을 한정해야 한다고 입법조사처는 제언했다.
최정윤 입법조사관은 "에너지 안보의 핵심은 개별 경직성을 일률적으로 제거하는 데 있기보다 위험 노출을 관리하고 필수적인 완충자산과 전환옵션을 체계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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