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철의 100투더퓨처] 정년은 없다…조선의 老스펙 공채

  • 초고령사회, 기로과의 상상력에 기대다

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박상철 전남대학교 연구석좌교수]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인구 고령화는 더 이상 예견할 미래가 아니라 이미 와 닿은 현실이며, 60대와 70대 중 상당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음에도 노동시장의 문 앞에서 한꺼번에 멈춘다. 정년이라는 제도가 오면 능력은 묻히고 나이만 남는다. 이 거대한 시간의 밀물은 한 세대의 문제로만 그칠 수 없다. 곧 사회 전체의 문제, 국가 전체의 설계 문제로 번진다. 그런데 300년 전 조선이 남긴 답이 있다. 바로 기로과(耆老科)이다. 늙었다는 사실, 즉 오늘 우리가 은퇴의 근거로 삼는 바로 그 조건을 관직 진출의 자격 요건으로 뒤집어 버린 사건이었다.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나이에 따른 정년이 사람을 내보내는 문턱이라면 기로과는 나이든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문이었다. 이 역발상을 다시 꺼내 보는 이유가 충분하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령 인력 활용의 장벽은 단순한 인식 부족이 아니라 제도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구조적 장벽: 어째서 고령 인력이 활용되지 않는가

우리 사회가 고령 인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데에는 세 겹의 벽이 있다. 첫째, 신분의 벽이다. 한국의 정년제는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노동시장 밖으로 자동 전환시키는 형태로 작동한다. 다시 들어오는 길은 인맥에 의한 비공식 자문 위촉 혹은 단순 반복적 업무의 재고용 정도로 한정된다. 두 방식 모두 공적이고 표준화된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다. 누구를, 어떤 검증으로, 어떤 자리에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사실상 비어 있다. 둘째, 평가의 벽이다. 일반 채용의 평가 체계는 젊은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빠른 순발력, 폭넓은 암기, 짧은 시간 안에 정리되는 사고의 흐름. 이런 잣대를 수십 년의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경쟁을 요구하는 셈이다. 경륜의 가치가 평가 도구와 만나지 못해 그대로 묻힌다. 셋째, 자리의 벽이다. 조직 안에는 고령 인력을 받아들일 정해진 자리가 거의 없다. 신설 직무가 아니고서는 자리가 없으며, 신설 직무를 만들어야 한다는 합의도, 예산도, 정원도 없다. 결국 고령 인력은 조직의 가장자리에서 임시로 머물다가 사라진다. 이 세 겹의 벽을 종합하면 결국 한 가지 진단이 나온다. 고령 인력을 다시 불러들이는 정당한 관문이 사회에 없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로과가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관문을 제도적으로 설계했다는 데 있다.

기로소와 기로과는 다르다

기로과를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기로소(耆老所)와 구분해야 한다. 기로소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기구로, 정2품 이상 고위 문신이면서 70세 이상인 인물들이 소속되는 일종의 원로 예우 기관이었다. 노인을 존중하는 경로(敬老)의 의미와 오랜 국정 경험과 지식을 가진 분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존현(尊賢)의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왕들은 일찍 가입하여 원로 존중의 상징적 기관이 되었다. 태조는 60세, 숙종은 59세, 영조와 고종은 51세라는 이른 나이에 특례로 입소하였다. 그러나 기로소에 든 사람들은 이미 고위직을 지낸 이들이었고, 자문 역할을 수행하긴 했지만 신규 등용의 통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로과는 결이 전연 다르다. 

기로과는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고령의 유학자들에게 관직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 준 특별 과거시험이었다. 오랜 세월 학문을 닦았지만 여러 이유로 등용되지 못한 채 나이가 든 선비들이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되는 제도였다. 일반 과거가 젊고 유망한 인재를 발굴했다면 기로과는 평가의 무게중심을 학문의 깊이와 인격적 덕망으로 옮겨 놓았다. 합격한 이들은 실제 관직에 임명되거나 그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시혜가 아니라 절차였고, 절차였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인사 체계로 작동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표암 강세황이다. 시·서·화 삼절로 당대 예원(藝苑)의 총수로 김홍도와 같은 탁월한 후배를 키웠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예술의 격을 높인 분이다. 당시 회갑 맞기가 꿈이었던 시절 64세 나이에 기로과에 장원급제하여 이후 예조판서 한성판윤으로 79세까지 관에 봉사하였다. 노년에 국가에 등용되어 자신의 축적된 전문성과 안목을 후배 세대와 국가에 돌려준 자랑스러운 시니어 모델이 아닐 수 없다.

비교사적 위치: 전무후무한 사례 

역사를 넓게 들여다보면 고령자의 경륜을 국가 운영에 활용한 사례는 결코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방식은 대체로 두 유형에 머문다. 한나라의 징소(徵召)는 황제가 지방에 은거하는 덕망 높은 원로나 은자를 특별히 초빙하여 벼슬을 맡게 한 하향식 제도였다. 당나라와 송나라에서도 고령의 대신들이 계속 중용되었고, 송나라에는 은퇴한 관료를 재기용하는 낙치사(落致仕)라는 절차도 있었다. 일본의 로주(老中)는 에도 막부 최상위 행정을 맡은 고령 무사의 직함 그 자체였고, 메이지 이후 원로들은 공식 직책 없이도 일왕의 자문과 총리 추천에 관여했다. 서양에서는 스파르타의 게루시아가 60세 이상만 지원할 수 있는 귀족들의 종신 원로회로서 입법과 사법을 모두 담당했고, 로마의 원로원은 세넥스(senex·'노인')에서 이름을 빌려왔지만 구성원은 이미 정치적 경력을 쌓은 귀족과 유력자들이었다. 영국의 상원, 싱가포르의 대통령 자문회의 모두 같은 결을 갖는다. 

이 모든 사례들의 공통점은 이미 검증된 소수의 엘리트'를 다시 부른다는 것이다. 하나는 원로 자문형, 다른 하나는 현직 재임용형이다. 기로과는 그 두 유형과 명확히 구분되는 세 번째 유형, 즉 고령자 특별선발형에 속한다. 아직 아무 지위도 갖지 못한 평범한 선비들이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나이 자체를 응시 자격으로 인정하는 별도의 시험 경로를 열어 주었다. 이는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특혜가 아니라 잠재적으로 다수의 무명 고령자에게 열려 있는 경쟁적인 공적 절차였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발상이다. 더 주목할 부분은 기로과가 지방과 중앙의 경계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일반 과거도 지방 유생에게 열려 있었지만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드는 준비는 중앙의 명문가 자제에게 유리한 구조였다. 반면 기로과는 지방에서 평생을 학문에 매진해 온 노년의 유학자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중앙 관료제가 놓치기 쉬운 지역의 잠재적 인재를 발굴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오늘의 지역 소멸과 수도권 집중이라는 문제와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다. 


이 고령사회, 무엇을 다시 그려야 하는가

이 역사적 사실이 오늘의 한국에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왜 300년 전 조선이 만든 관문을 닫아 두고, 같은 문제를 낡은 정년제도로만 해결하려 하는가? 물론 시대는 다르다. 21세기의 고령 인력 활용은 과거시험의 복원이 아니라 그 정신을 산업·정책·지역 현장에서 다시 구현하는 작업이다. 그 정신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나이를 결격 사유가 아닌 자격 요건으로 본다는 인식의 전환. 둘째, 그 인식을 뒷받침할 공적이고 표준화된 검증 절차. 셋째, 검증된 인력을 기존 정규 직위가 아니라 별도로 설계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 여기에 시대의 조건을 더하면 구체적 설계를 그릴 수 있다.

인력 차원: 자원 등록의 시대

응시 자격은 단순한 고령이 아니라 특정 분야의 장기간 축적을 함께 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만 65세 이상이면서 해당 분야에서 20년 이상 실무 또는 연구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그것은 기로과가 '나이뿐 아니라 학문과 덕망을 함께 평가했던 원칙'을 계승하는 길이다. 선발 방식은 젊은 인재 선발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해선 안 된다. 암기력이나 순발력을 요구하는 필기시험보다는 실제 정책 과제나 조직의 현안에 대한 자문 보고서 작성, 과거 경력에 대한 심층 면접, 후속 세대에 지식을 전수하는 역량 평가 등을 조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배치되는 자리도 조직의 정점이 아니라 정책 자문관, 멘토링 전담관, 특정 프로젝트의 고문, 위기 대응 자문위원 등 경륜이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별도로 신설된 자리로 설계되어야 한다. 조직 내 기존 인력과 위계 갈등을 최소화하면서도 고령 인재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임기는 정규 종신직이 아니라 3년에서 5년 계약직·임기제를 기본으로 두는 것이 현실적이다. 기로과 합격자들도 반드시 종신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예우와 실질적 역할 부여가 핵심이었고, 임기는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형식이었다. 청년 일자리와 충돌한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정원과 예산의 명시적 분리, 채용 대상 직무의 신설 한정, 그리고 지식 전수 지표로의 성과 평가까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고령 인재의 채용이 조직의 지속 가능성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정량적으로 보여 주지 못하면 이 제도는 갇힌 방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정책 차원: 단계적 도입 

제도 한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은 채 전면 확장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다. 1단계에서는 특정 부처나 지방자치단체 한두 곳을 선정해 정원 10명 내외로 시니어 자문관을 공개 모집하고, 그 성과를 정밀하게 추적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산업정책, 지역 재생, 재난 대응처럼 경험의 무게가 특히 중요한 분야가 시범 영역으로 적합하다. 2단계에서는 파일럿의 성과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선발 기준과 평가 체계를 정교화한다. 어떤 직무가 고령 인재의 강점과 가장 잘 부합하는지, 어떤 평가 방식이 실제로 유효한 예측력을 갖는지를 실증 데이터로 검증해야 한다. 동시에 기존 조직 구성원들의 수용도를 사전에 점검해 세대 간 갈등 소지를 빨리 발견하고 완화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3단계에서는 검증된 모델을 공공부문 전반으로 확산하고, 민간부문에는 세제 혜택·사회보험료 지원 같은 인센티브를 결합해 유사 제도의 설치를 유도한다. 중앙의 획일적 지시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별 자율적 변형을 허용하는 생태계적 접근이 더 오래 가는 제도를 만든다. 이 세 단계를 관통하는 원칙은 속도보다 신뢰성이다. 제도는 몇 차례 성공 사례에서 만족하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일관된 기준을 유지함으로써 사회적 신뢰를 쌓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기업과 사회조직 차원 

기업과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같은 발상이 가능하다. 산업별 시니어 멘토 풀, 학교와 공공기관의 시니어 펠로십, 지역 재생 전문가 풀. 이름은 분야별로 다를 뿐이며 본질은 같다. 오랜 현장의 사람을 표준화된 절차로 발굴하고, 그 사람에게 별도의 자리를 주는 것이다. 특히 지역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에서는 은퇴한 전문 인력을 지역 정책 자문관이나 산업 멘토로 특별 채용하는 방식이 기로과의 정신을 지역 재생의 도구로 발전시킬 수 있다. 수도권의 인적 자원이 지방으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는 늘 부족했고, 그 부족은 세금을 들여도 쉽사리 메워지지 않았다. 다만 같은 지방에서 평생을 일한 노년의 인력을 다시 그 지방의 설계에 끌어들이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자원이며, 표준화된 절차로 발굴될 때 비로소 자원이 된다.

개인의 차원

마지막으로, 개인 차원에서도 같은 일이 필요하다. 60·70대가 스스로를 은퇴 대상으로만 두기보다 자신의 경력을 다시 공공의 자원처럼 등록하고 활용하는 문화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일본의 시니어 인턴, 독일의 경험 전문가 자문단 같은 사례들이 이미 그 길을 보여 준다. 한국도 이제 그 길을 자신의 언어로 옮겨야 한다. 정년 이후의 삶이 곧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

오래된 미래 

초고령사회는 더 이상 '다가오는 미래'가 아니다. 이미 와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지금 60·70대의 건강한 인구를 어떻게 다시 사회적 자원으로 불러들일 것인가를 묻고 있다. 300년 전 조선의 기로과는 그 질문에 대한 놀라울 만큼 정직한 답을 남겼다. 이미 검증된 소수의 원로를 예우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다수의 고령자에게 표준화된 관문을 열어 주는 것. 그것은 늙음을 부양의 대상에서 자격으로, 다시 일의 주체로 옮기는 사회적 결정이었다. 오늘 우리가 상상해야 할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나이를 결격 사유에서 자격 요건으로 다시 정의하는 작은 철학적 전환, 그것을 뒷받침할 표준화된 선발 절차, 그리고 세대 간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는 직무 설계. 이 세 가지를 갖춘다면 기로과는 박물관의 전시품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정책 모델로 다시 살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상상력이 때로는 미래의 가장 정직한 청사진이 될 때가 있다. 늙음을 다시 자격으로 읽는 일, 그것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가장 쓸모 있는 유산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필자 박상철 주요 이력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장 ▷국제백신연구소한국후원회 회장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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