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범석은 호포항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장이다. 외딴 마을에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나타나면서 범석은 신입 경찰 성애(정호연), 주민들과 함께 사태의 한복판에 놓인다.
범석은 강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목소리를 높이고 욕설을 내뱉는다. 마을에 위험이 닥치자 자신이 질서를 세우고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상한 모습이 드러난다. 가장 강한 말을 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주 머뭇거린다. 주민들이 괴생명체 포획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성애는 범석보다 총을 잘 쏜다. 마지막에는 향후 대책조차 성애가 먼저 제안한다.
범석은 강한 지도자일까, 강한 척하는 무능력자일까.
▲ 욕설은 역할의 갑옷
범석의 거친 언행은 자신감의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지켜보면 욕설과 큰소리는 실제 능력보다 먼저 나온다. 상황을 장악한 뒤 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말함으로써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느끼려 한다.
조지프 밴델로와 제니퍼 보슨은 남성성을 생물학적 고정이 아닌 '사회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위태로운 상태'로 정의한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적 성공, 강인함, 위험 감수 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범석에게 남성성의 위협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태도에는 '경찰은 겁을 보여서는 안 된다', '마을의 책임자는 강해야 한다'는 역할 규범이 묻어난다. 괴생명체가 두려워도 두렵다고 말할 수 없으니, 욕설과 호통으로 두려움을 덮는다.
이때 강한 태도는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 된다. 범석은 강해서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강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책임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수 있다.
그의 책임감까지 허세인 건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마을을 지키려 한다. 위험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 채 사라지지도 않는다. 범석의 허세가 흥미로운 이유는 책임을 피하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감당하기 벅찬 책임을 어떻게든 수행하려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 사람을 통제하려 하지만 의심하지는 못한다
범석은 신고되지 않은 총기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법과 절차를 앞세워 총기의 주인을 통제하려 한다. 마을의 안전은 규칙을 지켜야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해술이 아저씨가 말한 거면 진짜에요."
반면 그는 타인의 거짓 진술에는 의외로 쉽게 넘어간다. 사람들을 단속하면서도 그들이 자신을 속일 가능성에는 둔감하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행동은 같은 믿음에서 나올 수 있다.
범석이 익숙한 세계는 얼굴을 알고 지내는 작은 공동체다. 그곳에서 경찰의 역할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거짓말쟁이로 의심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대체로 규칙을 따른다는 전제 아래 질서를 조정하는 것이다.
진실 기본값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의심을 촉발할 만한 분명한 계기가 생기기 전까지 상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모든 말을 끊임없이 의심해서는 일상적인 의사소통과 협력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범석은 권위적이지만 냉소적인 사람은 아니다. 사람에게 명령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는다. 문제는 괴생명체의 등장으로 기존의 상식과 관계가 모두 무너졌다는 것이다.
범석은 사람을 관리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의심하고 추론하며 숨은 의도를 밝혀내는 데에는 능숙하지 않다. 일상적인 치안 책임자로서는 버틸 수 있었던 약점이 비정상적인 재난 앞에서 한꺼번에 드러난다.
▲ 움직이는 것과 해결하는 것은 다르다
범석은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괴생명체를 포획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현장을 찾아다니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한다. 열과 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해결 능력은 별개다.
범석은 행동을 시작하는 데에는 빠르지만, 전체 상황을 구조화하는 데에는 약하다. 상대의 특성을 파악하고, 실패할 가능성을 계산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보다 그때그때 눈앞에 나타난 문제에 반응한다. 잔실수가 반복되고 계획은 쉽게 흐트러진다.
그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지만 전략은 부족하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질수록 움직임 자체가 문제 해결을 대신한다. 현장을 뛰어다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에는 자신이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그 행동들이 하나의 계획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범석의 잔실수를 지능이 낮아서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는 평소의 권한과 경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건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만 반복한다. 법을 말하고, 사람을 모으고, 총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괴생명체는 기존의 경찰 업무로는 해결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도자다.
▲ 눈물을 본 순간, 괴물은 생명이 된다
범석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괴생명체를 겨누는 순간 나타난다. 마을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하지만 도망치는 괴물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범석은 결정타를 망설인다.
이 장면에서 바뀐 건 범석이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처음 괴생명체는 마을을 공격한 '적'이었다. 적에게는 제거해야 할 위험성과 공격 의도만 부여된다. 하지만 눈물은 그 존재에게 공포, 고통,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마음 지각 연구는 사람들이 다른 존재에게 생각과 의도뿐 아니라 고통, 공포, 쾌락을 느끼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할 때 그 존재를 도덕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쉬워진다고 설명한다. 특히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는 판단은 상대를 물체가 아니라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조금 전까지 괴물을 죽이는 일은 마을을 지키는 임무였다. 하지만 고통받는 생명이라는 인식이 생긴 뒤에는 같은 행동이 일방적인 살해처럼 느껴진다. 그의 머뭇거림에는 공포도 들어 있을 수 있지만, 공포만으로는 이후의 분노를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사냥꾼의 총에 아기 외계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자 범석은 크게 격분한다. 사람의 아기가 살해된 것처럼 충격과 슬픔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어린 존재의 외형과 행동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베이비 스키마'가 연결될 수 있다.
중요한 건 대상의 종이 아니다. 범석에게 그 존재가 '외계인의 새끼'에서 '보호받아야 할 아기'로 다시 분류됐다는 점이다. 이때 사냥꾼의 총격은 약한 존재를 향한 폭력으로 바뀐다.
범석의 정은 판단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판단을 멈추게도 한다. 그의 공감은 전투에서는 약점이지만, 괴생명체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지 않게 만드는 도덕적 제동장치다.
▲ 직책은 범석에게 있지만, 리더십은 다른 사람에게 이동한다
범석은 경찰서장이지만 괴생명체와의 싸움에서는 유능한 사람이 아니다. 주민들은 그보다 적극적이고, 신입 경찰은 그보다 총을 잘 다룬다. 마지막에 주민들을 학교로 대피시키고 총기를 나눠주자는 계획도 성애가 먼저 제시한다. 범석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해라"라고 답한다.
이 장면은 범석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일 수 있다. 그동안 경찰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잘 알고,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는 적어도 자신보다 나은 대책을 낸 사람의 말을 막지 않는다. 나아가 내면의 혼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범석은 전투형 지도자도, 전략형 지도자도 아니다. 주민들을 압도적으로 지휘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을 사람들을 자신의 책임 아래 있는 이웃으로 여기고, 문제가 생기면 도망치고 싶어도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고, 적의 고통을 본 뒤에는 기존 판단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강한 척하는 약자가 아니라, 강해야 한다고 믿는 다정한 사람이다. 책임감은 있지만 그 책임을 수행할 전략이 부족하고, 권한은 있지만 위기에서 사람들을 이끌 실력이 충분치 않다.
범석의 실패는 선한 마음이 곧 유능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대로 그의 머뭇거림은 결단력 부족만을 뜻하지 않는다. 모두가 괴생명체를 죽이는 데 몰두할 때, 그는 뒤늦게라도 그 안에서 고통받는 생명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범석은 이 영화가 품은 또 하나의 '호프'일지 모른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