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써서 '이 정도면 초고가 됐고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한 때가 2018년이었어요. 그때부터 준비를 했죠. 그런데 공정이 되게 많았습니다. 준비할 것도 공부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어요. 이야기도 더 구체화하고 심화시켜야 했고요. 제일 중요한 건 어떻게 메이킹을 할 것이냐였어요. 촬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후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비는 있는지부터 요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호프'는 비무장지대 인근 호포항에서 호랑이 출몰 소식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제79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데 이어 제작비 700억원대 대작이자 2026년 한국영화 최대 기대작으로 극장가의 시선을 모으는 가운데, 칸영화제에서 먼저 공개된 뒤 국내 개봉 버전에는 일부 편집 변화가 있었다.
"중간에 등장하는 양배(음문석 분)라는 인물의 샷들을 걷어낸 게 있었는데 계속 아쉬웠거든요. 그래서 그 인물과 관련해 걷어냈던 샷들을 다시 복구시키고 강화했습니다. 그러면 또 길어지잖아요. 그래서 정확히 필요한 게 아닌 건 걷어내자고 해서 몇 장면을 덜어냈습니다."
"그 시간이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되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다고 찍어놓고 이야기나 영화에 손상이 되는 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그 시간 동안 더 편안하고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작비 700억원대 대작이라는 점에서 부담도 컸다. 한국영화 산업이 침체를 겪는 상황에서 나 감독은 내수 시장만을 염두에 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장르적 확장과 글로벌 시장을 함께 고려했다고 말했다.
"그 생각은 당연히 있었죠.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시장 전체에 엄청난 변화가 오겠다는 예감이 있었습니다. 제 전작들도 그랬고 한국 영화의 특징 중 하나가 다양한 장르를 한 편 안에 잘 버무려 믹스한다는 것이잖아요. 외국 기자분들도 한국 영화가 어떻게 한 편 안에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잘 섞느냐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요. 그것을 조금 더 장르 쪽으로 옮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내수 시장만을 고려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저문 것 아닌가 하는 예감도 들었어요. 결국 외부에서도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쪽에 더 집중하고 수준을 높이려고 했던 영화입니다. 걱정되죠. 무모해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영화의 중요한 축인 외계인의 디자인 역시 오랜 시간을 들인 결과물이다. 나 감독은 익숙한 외계인 이미지에서 출발했지만 할리우드에서 다양한 크리처 작업을 해온 이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형태와 구현 방식을 계속 수정해나갔다.
"처음에는 타블로이드지에 나오는 어디서 만들었는지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이미지 속 외계인들이 있잖아요. 그런 전통적인 디자인을 등장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외국 분들과 작업하면서 많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떤 영화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있고 흐름이 어떤지 들으면서 애초에 생각했던 부분을 지킬지 바꿀지 고민했어요. 시나리오에 대한 설명과 조언도 많이 들었고 어떤 장면이나 상황에서는 이렇게 가는 게 좋겠다, 저렇게 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변화를 겪었습니다."
디자인이 완성된 뒤에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크리처가 실제 장면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움직이는지, 배우와 배경, 액션의 속도 안에서 얼마나 드러날 수 있는지가 또 다른 과제였다.
"디자인이 종결됐다고 여겼을 때쯤에는 촬영 준비와 후반, 실체화 과정에서 또 변화가 생겼습니다. 영화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 디자인이 그대로 잘 보이는 것도 아니고요. 대낮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면 모션 블러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크리처도 당연히 그런 합성을 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애초에 디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샷들이 몇 컷 없어지게 됩니다. 시작부터 여기까지 따지면 말도 안 되는 시간이 걸렸고 매일매일 변화를 겪어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호프'의 시작점은 오래전 한 여행지에서 마주한 낯선 마을의 기억이었다. 나 감독은 외국의 작은 동네에서 느꼈던 기묘한 공포와 긴장감을 수첩에 적어뒀고 그 메모들이 영화의 출발이 됐다고 했다.
"15년 전인가 외국에 여행을 갔다가 차를 타고 한참 돌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귀가하는 길에 잠깐 쉬려고 들른 작은 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가 너무 희한한 거예요. 사람이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집집마다 토템 같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대낮인데도 무서웠어요. 그곳에 잠깐 있다가 왔던 기억이 있는데 그날 수첩에 한 20장, 30장 정도 메모를 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그 메모들이 아마 이 영화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요."
배우들의 액션은 나 감독에게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배우들이 단순히 작품에 동의한 수준을 넘어 실제 구현을 위해 필요한 훈련과 준비를 감당해냈다고 했다.
"배우분들이 이 모든 것에 동의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의 이상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합을 맞추려면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해야 하잖아요. 어떤 액션이 실질적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건 아무리 못해도 50명 정도, 그 이상의 사람들이 정확하게 합을 맞춰야 가능한 일입니다. 배우분들은 그 합을 맞추기 위해 더 노력하셔야 했어요. 말을 타야 한다면 말과 친근해져야 하고 승마도 익혀야 하죠. 그런 노력들을 너무 열정적으로 해주셨습니다."
CG로 처리될 것이라 생각했던 장면까지 배우들이 직접 해낸 순간도 있었다. 나 감독은 이를 "기적처럼 해냈다"고 표현했다.
"현장에서는 모두가 CG로 정리될 줄 알았던 것들이 꽤 있었더라고요. 실제로 배우가 직접 연기해서 마무리될 장면이라고 모두가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우들이 그걸 기적처럼 해내셨어요. 말에서 한 발로 내려서 다리를 옮기는 액션 같은 건 일반인이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자동차를 몰면서 운전하고 연기하고 촬영까지 해야 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다들 감사했어요."
디테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홍진 감독은 현장에서 타협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태도보다 여러 대안을 준비해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현장에서 타협이 없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얼마나 시뮬레이션을 많이 해서 다양한 대안을 만들어놨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실제로 얼마나 많이 준비해놨느냐도 중요하고요. 저는 무조건 밀고 가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이게 안 된다면 이렇게 가서 이 장면을 표현해야겠다고 가는 식이에요."
그의 영화가 공개될 때마다 관객들은 강렬한 체험을 기대한다. 나 감독 역시 그 기대를 모르지 않는다. 그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작품을 내놓는 순간이 가장 긴장된다고 했다.
"그 부담은 당연히 있습니다. 제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인 것 같은데 객석에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을 진짜 어렵게 생각해요. 제가 관객으로 영화를 볼 때 특정한 필름메이커의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는 굉장히 긴장하고 보는 태도도 달라집니다. 저는 관객 여러분들이 제 영화를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해요. 제가 정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죠. 나에게 뭐가 있겠느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더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한국영화 위기 속에서 '호프'에 쏠린 기대에 대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한 편의 영화가 산업 전체를 구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의 선택을 돕는 작품이 되기를 바랐다.
"부담됩니다. 다만 주체가 조금 달라지는 게 있죠. 관객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이지 이 영화가 한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 작품이 그런 조력, 그런 역할을 해줄 수는 있겠지만 키는 관객분들에게 있습니다. 관객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극장을 찾는 수고를 해주시고 영화를 얼마나 아껴주시고 이해해주시는지가 중요하죠. 부담됩니다만 하여튼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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