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노 칼럼] 반도체 지방 이전 논쟁 유감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이학노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처음 개최되어 제2차 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4년마다 꾸준히 개최되어 온 월드컵. 2002년 일본과 공동 개최한 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썼다. 25번째로 개최되고 있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한국의 선전을 기원한다.
 
어느 운동 경기나 논란이 많았던 심판의 오심을 줄이고자 스포츠에도 AI가 도입되었다. 야구에는 스트라이크 판정을 위한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이 도입되었고 이번 월드컵에서도 오프사이드, 핸드볼과 페널티 킥 판정에 AI가 쓰이고 있다. 크루즈 콘트롤을 넘어 중국과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사람 없이 달리고 있는 자율주행(self-driving) 차량, 환자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치료에 도움을 주는 의료분야 AI, 금융 분석과 판단에 활용되는 AI 파이낸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AI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바야흐로 AI가 새로운 인류문명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 AI의 시대의 중심은 반도체이다. 전 세계가 반도체의 흐름에서 밀려 나지 않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영원한 라이벌 중국을 견제하고자 반도체 동맹의 스크럼을 짜고 우방국을 결집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있어서 반도체의 각축장에서 린치핀 역할을 맡고 있다. 당연히 반도체는 우리 경제, 수출, 증시에서도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금년 경제성장률이 명목으로 10%를 넘는다거나 실질성장률도 3%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반도체가 있어서 가능하다. 올해 수출이 1조 달러를 돌파할 것이라는 기대까지 나오고 있지만 그 역시 최근 수출에서 40% 비중을 넘는 반도체가 있어서 가능하다. 증시에서도 반도체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당연히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우려 또한 없지 않다. 당장의 반도체 호황을 즐기다가 변화하는 미래에 대비하지 못할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반도체 공장의 지방 설립이다. 반도체 회사들의 엄청난 흑자가 성과급 논란을 촉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권과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반도체 공장 지방 이전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반도체의 지방 이전 요구는 초과 이익 내지는 성과급 요구의 변형, 즉 정치적 논리로 기업의 이윤 창출의 원천을 공간적으로 분배하려는 발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기시감이 있다. 바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이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과 기업의 지방 이전은 모양은 비슷할지언정 본질은 크게 다르다. 공공기관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고 국가 예산이 지출되는 기관들이기 때문에,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방침을 거스를 명분과 방법이 없었다. 예산으로 지탱되는 공공기관과 달리 지방으로 이전한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거나 살아남지 못하면 곧바로 도산하게 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치적 동기가 작동하여 국제 행사를 유치하고 공공시설을 짓는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지어진 경기장과 컨벤션 센터 등 각종 시설이 행사가 끝난 뒤 용도 폐기되어 골칫거리인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행사 유치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는지 모르지만, 예산의 낭비와 비효율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과 비슷한 모습이 기업의 지방 이전에서도 되풀이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책의 잘잘못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는 '글로벌 스탠다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각국 정부의 규제와 혜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외국계 초일류 기업들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외국인 투자의 유치에 노력하고 있는 한국 정부이지만 만약 한국 정부가 글로벌 기업에게 그 기업이 원하는 수도권이 아닌 특정 지방으로 갈 것을 요구한다면 그들이 순순히 응하겠는가. 아마 그 기업은 한국에 오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갈 것이다. 최근 경기도에 7천억 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려던 외국인 투자 기업들이 정부의 반도체특별법령 지원에서 '수도권 제외'라는 규정 때문에 투자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우려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글로벌 기업들은 정치성보다는 철저한 상업적 합리성을 좇아 움직인다. 인프라가 충분치 않고 인재 유치가 어려운 지역으로 입지를 유도하는 순간,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이라는 선택지를 외면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MAGA)를 앞세워 한국을 비롯한 외국기업들에게 대미 투자를 강요했을 때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시장의 원리와 글로벌 공급망의 흐름을 무시한 힘에 의존한 정치적 압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정치권이 지역 균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우리 기업들에게 반도체 공장의 지방 이전을 강요한다면 더 이상 트럼프를 비난하기 어렵게 된다. 대미 투자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한 상업적 합리성을 요구하면서, 막상 국내 기업을 향해서는 상업적 합리성이 아닌 다른 덕목을 요구한다면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세계적인 첨단 산업 클러스터의 효시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이다. 실리콘밸리의 일부 기업들이 오스틴을 비롯한 텍사스 지역으로 확장·이전한 것은 정부의 강제적인 행정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기업 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적고, 풍부한 기술 인력의 확보와 저비용 등 시장 여건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텍사스 주정부의 여러 인센티브가 있었지만, 시장 여건이 대세를 좌우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잘 자라던 나무도 다른 곳에 심으면 잘 키우기 어렵듯이, 자생적인 생태계가 마련되지 않은 곳에는 경쟁력 있는 클러스터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정치적인 시도는 20~30세대 등 젊은 층의 불만을 가중할 우려가 있다.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우리 경제 전반의 펀더멘탈은 좋다고 보기 어렵다. 지금의 반도체 호황은 선발 투자의 유리함도 있지만 미·중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요인과 AI 붐이라는 사이클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한국의 주력 산업들은 중국의 매서운 추격에 밀려 경쟁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전통 제조업의 침체는 고스란히 청년 실업의 장기화와 고용 쇼크로 이어진다. 첨단 AI의 호황을 자축하면서 정작 우리 청년들의 고용 절벽에 속수무책인 모순이 우리 경제의 그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잘 나가는 반도체 공장을 가져가려는 곳과 지키려는 곳이 충돌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과거 지역산업 육성책의 전면 개정판으로 해석되는 5공 3특의 산업구조 전환 구상과 반도체 공장의 지방이전 논의의 타이밍도 공교롭다. 초격차 산업강국이라는 웅대한 목표 또한 반도체 공장의 지방 이전으로 빛을 발할 가능성이 있다. 지방의 인프라가 갖춰지고 반도체 공장이 완공되려면 많은 자본과 시간이 필요하다. 급변하는 반도체 사이클의 하강 국면이 도래하면 반도체 지방 이전에 대한 후폭풍이 거세질 우려도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의 강자일지언정, 거대한 AI 생태계에서는 빅테크 기업들에게 종속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반도체 공장을 어디에서 지을까 하는 이전투구식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기업들이 상업적 합리성에 따라 글로벌 생태계 내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경영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노동집약적인 후공정(패키징) 라인을 지방으로 이전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를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후공정 이전이 시작되고 나면 정치권과 지자체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전공정(팹)까지 이전하라고 요구할 것이 자명하다. 이 정부에서 잘 시행되고 있는 많은 정책이 있다. 그러나 반도체 지방 이전 시도로 자칫하면 정치를 이기는 시장은 없는 것처럼 정부의 뜻이 오독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학노 필진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 경제학 박사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케이더블유 경제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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