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상장 금지 가이드라인 발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자본시장 선진화와 주주가치 제고가 핵심 정책 과제로 떠오르면서 금융당국도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 자본시장의 대표적인 고질병으로 지적돼 온 중복상장 관행에 제동을 걸게 됐다는 기대와 동시에 기업들의 투자 여력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모회사가 상장돼 있는데 알짜 자회사를 추가 상장하면 기존 주주 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상장 당시 LG화학 주주들의 반발이 대표적이다. SK와 카카오, 포스코 등도 계열사 상장을 둘러싸고 비슷한 논란을 겪었다.
금융당국이 주주 보호 장치를 강화하려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줄기차게 회자된 '코리아 디스카운트' 역시 소액주주 권익 보호 미흡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해외 투자자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다만 또 다른 현실적 고민도 있다. 미국과 한국은 산업 구조부터 다르다. 미국 증시는 금융과 플랫폼, 소프트웨어, 첨단기술 기업 중심이다. 스타트업 생태계와 벤처캐피털 시장도 잘 발달돼 있다. 유망 사업이 성장 자금을 확보하는 통로가 다양하다. 모회사와 분리하지 않더라도 외부 투자 유치가 가능하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 국가다. 반도체와 배터리, 미래차, 로봇 등 신산업 대부분이 막대한 자본 투입을 전제로 한다. 연구개발부터 생산시설 구축까지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하다. 결국 상당수 기업은 자회사 상장을 통해 성장 자금을 확보해 왔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은 상장으로 유치한 자금을 북미 생산기지 확대와 배터리 기술 개발에 투입했다. SK온 역시 상장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규모 투자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로봇과 인공지능(AI), 바이오도 향후 대규모 자본 조달 수요가 불가피하다.
획일적인 중복상장 금지는 미래 사업 투자금 조달 여력을 줄여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첨단산업에서 한국 기업만 손발이 묶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주주 보호와 산업 경쟁력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 핵심은 균형이다.
무조건 금지보다 합리적 통제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자회사 상장이 불가피하다면 기존 주주들에게 우선 배정 기회를 확대하고, 모회사 주주 가치 훼손 여부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절차를 강화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미국과 일본처럼 독립된 이사회 심사와 소액주주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규제 만능주의다. 특정 사례에 대한 시장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중복상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접근은 위험하다. 제조업 중심 국가인 한국의 산업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해외 사례만 단순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자본시장의 목적은 주주 보호에만 있지 않다. 기업 성장과 산업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주주 가치 제고라는 명분이 미래 성장동력의 싹까지 자르는 결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은 앞으로 한국 자본시장과 산업 경쟁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정책이다. 금융당국은 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목표와 기업 성장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나친 규제도, 무분별한 허용도 답이 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칙 없는 금지가 아니라 산업 현실을 반영한 정교한 제도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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