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사회는 다혜에게 A를 용서하라고 권유한다. 다혜 또한 미성년자인 범인이 반성하기를 바라며 용서하기로 결정한 뒤 A의 감형을 위해 탄원서를 써주면서 진정한 용서로 한 걸음 나아간 듯 보인다.
사건 발생 1년 뒤 다혜는 방송국을 그만두고 성당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하며 여러 용서의 사례를 목격한다. 연쇄 살인마의 손에 가족을 잃은 유족을 찾아가 어떻게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었는지 묻자 유족은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내가 독약을 먹고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더라. 그래서 무조건 용서하기로 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라며 “용서는 고통 속의 자유”라고 말한다.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용서를 선택한 다혜를 향해 “대단하다”, “쉽지 않은 선택”이라며 칭찬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낙인한다. 낙인이라는 것은 결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갇히는 것이다. 결국 다혜는 ‘약혼자를 살해한 이를 용서한 인물’이라는 사회의 기대 속에 갇히고 만다.
결국 극 속에서 다혜는 자신의 용서 속에 반성한 A가 학교로 돌아가 새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A가 또 다른 동급생을 살해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한 용서가 또 다른 누군가의 소중한 인생을 빼앗은 것이라고 자책한다. 결국 자신이 한 용서가 진정으로 가해자를 구원하는 길이었는지 묻게 되고 다시 절망에 빠진 다혜는 혼란 속에 몸부림친다.
보통 영화 속 용서의 과정은 갈등을 마무리하는 결말처럼 등장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면 응어리가 풀리고 삶도 제자리를 찾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혜에게 용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분노해야 하는데 분노하지 못하고, 괜찮다고 말했지만 실제론 괜찮지 않다. 상처는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말하면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타오르는 분노보다 더 깊은 흔적을 남긴다.
영화 속에서도 이 점을 콕 집는다.
“용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죠. 이 사회는 용서만 있고 반성이 없어요. 그러니 나쁜 일이 반복되죠. 대책 없는 용서는 죄입니다.”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위 같은 질문은 최근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 다시금 묻게 되는 질문이다. 법의 단죄 앞에 어느새 피해자의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사라지고, 형량이 선고된 뒤 가해자는 모든 죄를 갚았으며 그가 혹여 종교에 의지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피해입은 이들보다 가해자의 반성에 찬사를 보내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 사이 피해자들은 혹여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하거나 절망의 늪에 빠져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낸다.
피해자들의 아픔은 오래토록 남지만 사회적으로는 되려 공격 받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 혹은 유족들의 연대는 정치적인 의미로 왜곡되고 많은 이들은 “왜 아직도 그러느냐”며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참사는 불특정 다수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길 만큼 커다란 아픔으로 자리 잡는다. 이들은 모두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한 순간에 잃은 이들일 뿐이다.
영화 ‘오늘’은 피해를 입은 이들의 극적인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 상실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힘이다.
치유라는 것은 결국 아픔 속에서 여전히 괜찮아지지 않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선택할 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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