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최근 “오늘의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은 한국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진단했다. 위기의 전조가 아니라 성장 과정의 ‘마찰음’이라는 주장이다. 반도체와 AI 중심의 수출 호조, 기업 실적 개선, 자산가격 상승이 경제 체질을 바꾸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일정 부분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실제 한국 경제는 과거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다. 외환보유액은 과거보다 훨씬 크고, 제조업과 반도체 경쟁력도 세계 정상급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AI와 첨단산업 투자 확대 역시 새로운 성장 기대를 만들고 있다. 단순한 경기 침체 국면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최근 원화 약세를 단순한 외환위기 신호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평가차익 실현, 글로벌 달러 강세, 중동 리스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수출 증가와 AI 투자 확대가 한국 경제의 체력을 일정 부분 지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해석이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을 ‘성공의 비용’으로만 규정하기에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험이 여전히 크다. 경제는 기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냉정한 현실 점검이 필요하다.
경제학적으로 고물가와 고금리가 반드시 성장의 신호만은 아니다. 수요 확대에 따른 ‘좋은 인플레이션’도 있지만 공급 충격과 비용 상승이 만든 ‘나쁜 인플레이션’도 있다. 지금 한국 경제에는 두 요소가 동시에 섞여 있다. AI와 반도체 호황이라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 반면, 중동발 에너지 가격 상승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 가계부채 부담이라는 위험도 함께 존재한다.
특히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뇌관은 부채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높은 수준이다. 금리가 높은 상태가 장기화되면 소비 위축과 부동산 시장 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대기업은 버틸 수 있어도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금융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환율 역시 단순 낙관만 하기 어렵다. 원화 약세는 수출기업에 일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수입 물가 상승과 에너지 비용 증가를 유발한다. 한국처럼 원자재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에서는 고환율 장기화가 국민 생활비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환율은 단지 경제 체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미국 금리 정책과 지정학 리스크, 글로벌 자금 흐름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의 과실이 얼마나 폭넓게 확산되느냐다. 지금 반도체와 AI 중심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를 끌어올리고 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일부 대기업과 자산시장만 좋아지고 중산층과 자영업자는 어려워진다면 체감 경제는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경제 지표와 국민 체감의 괴리가 커지는 순간 사회적 갈등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론에 빠질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균형 감각이다. 한국 경제는 분명 새로운 산업 전환기에 들어가고 있다. 반도체와 AI, 바이오, 방산, 콘텐츠 산업은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그 성장의 기반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느냐다.
우선 생산성 혁신이 필요하다. AI 시대에는 노동생산성과 산업 전환 속도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단순 제조 경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연구개발 투자와 인재 양성, 데이터 인프라 구축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재정과 통화 정책의 균형도 중요하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무조건 유동성을 확대하면 장기적으로 물가와 자산시장 불안을 키울 수 있다. 반대로 긴축만 강조하면 내수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시장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성장 동력을 살리는 정교한 정책 조합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경제에 대한 냉정한 현실 인식이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을 모두 ‘성공의 비용’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정책 경계심은 약해질 수 있다. 경제는 늘 양면성을 가진다. 성장의 기회 속에도 위험은 공존한다.
김용범 실장의 말처럼 지금 한국 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는 과정일 수는 있다. 그러나 도약의 마찰음이 진짜 도약으로 이어지려면 체질 개선과 구조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 생산성 없는 자산 버블과 과도한 부채 위에 세워진 성장은 오래가기 어렵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론도, 과도한 비관론도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균형 감각과 미래 산업을 키우는 전략, 그리고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 역량이다. 그것이야말로 AI 시대 한국 경제가 진정한 선진경제로 도약하기 위한 기본이고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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