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더욱 깊어지는 K자형 양극화의 골… 더욱 절실해진 이대통령의 민생 정치

곽재원 논설위원장
[곽재원 논설위원장]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지만, 때로는 거대한 착시를 만든다. 최근 발표되는 경제 지표들을 보면 한국 경제는 순항 중인 것처럼 보인다. 전 세계적인 AI(인공지능) 열풍으로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는 소위 '멤플레이션(Memflation;메모리+인플레이션)' 덕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역대급 실적을 올리고 있고, 코스피 지수 역시 하방을 단단히 지켜내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매크로(거시) 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견디기 힘들 정도의 냉골이 도사리고 있다. 반도체가 뿜어내는 온기는 대기업과 일부 금융 계층에만 고이는 '국소적 과열'일 뿐이다. 정작 서민 경제의 핏줄인 골목상권과 중소기업, 창업기업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가 몰고 온 '호르무즈 인플레이션'이 고환율과 고물가라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서민의 밥상과 자영업자의 생존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매크로는 버티는데 마이크로(미시)는 무너지는, 이 기이한 양극화야말로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가장 심각한 딜레마이다.

사실 한국 경제는 이 두 가지 인플레이션이 양방향에서 잡아당기는 거대한 시소게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전형적인 원유 수입국인 동시에 세계 메모리 공급을 주도하는 독특한 산업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현상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한국 경제의 손익 방정식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먼저 호르무즈 인플레이션은 한국 경제의 연료 공급선을 마비시키는 파괴력을 지닌다. 원유 도입량의 상당 부분을 중동 해로에 의존하는 한국으로서는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어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돌파할 경우,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원화 가치 하락과 환율 급등을 부르고, 다시 수입 물가를 밀어 올리는 악순환을 낳는다. 화학, 철강, 자동차, 항공 등 원가 압박을 받는 전통 제조·서비스업의 마진이 급감하면서 내수 경기는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을 방어하는 보루가 바로 멤플레이션이다. AI 대전환으로 촉발된 반도체 호황은 한국 경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고대역폭 메모리(HBM)나 고용량 가전·서버용 제품에서처럼 독점적 지위를 가진 첨단 반도체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상대로 높은 가격 전가력을 갖는다. 유가 상승으로 유출되는 달러를 반도체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가 일정 부분 상쇄(Buffer)해 주는 구조다. 이 때문에 주식 시장 역시 통째로 가라앉기보다는 반도체와 에너지 인프라 등 상단 주도주만 살아남고, 전통 제조·소비재 등 하단 소외주는 침체하는 극단적인 ‘K자형 차별화’가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매크로 차원의 상쇄 효과가 국민 개개인의 삶에는 아무런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위기의 징후들은 이미 구체적인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최근 미국 골드만삭스는 상업 재고와 국가 전략 비축량을 합친 전 세계 원유 재고량이 이달(5월) 말경 수요의 100일 분량을 밑돌 가능성이 크다는 경고를 내놓았다. 호르무즈 해협의 실질적 봉쇄로 공급 제약이 장기화되면서 재고 소진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각국 정부가 강제 정전과 재택근무 등 처절한 절약 움직임에 나섰지만, 시장의 대응은 늘 한발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반면 선박이 멈춰 선 바다 위와 달리 디지털 공간의 과열은 멈출 줄 모른다. 생성형 AI에 대한 폭발적인 성장 기대를 배경으로 반도체 메모리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 뉴타닉스의 라지브 라마스와미 최고경영자(CEO)가 "이러한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적어도 1~2년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물리적 자원의 고갈 속도만큼이나 디지털 자원의 독점 속도가 빨라지는 이 기이한 이중 인플레이션의 파고 속에서 대한민국 민생 경제의 체감 온도는 이미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더 큰 문제는 타이밍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한복판에 서 있다. 지방선거가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표심을 의식한 선심성 공약들만 난무할 뿐 이 냉혹한 경제 딜레마를 풀기 위한 정교한 처방전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선거가 끝난 뒤에 찾아올 정국 주도권 싸움과 극심한 여야 대치라는 '선거 후유증'을 생각하면 민생을 위한 골든타임이 이대로 흘러가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잦아들지 않는다.

이 사면초가의 정국에서 우리는 이재명 대통령의 '민생 정치력'을 주목한다. 선거의 승패나 진영의 논리를 넘어 지금 대통령이 보여줘야 할 정치력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국민의 삶을 구해내는 '실용주의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민생 정치력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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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멤플레이션의 결실을 민생의 온기로 강제 순환시키는 펌프질이 필요하다. 첨단 산업이 벌어들인 천문학적인 초과 이익이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으로만 고이지 않도록 중소 부품·장비 협력사를 위한 안심 기금 조성을 유도하고 세제 혜택으로 화답하는 정교한 상생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둘째, 호르무즈 인플레의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에 대한 '핀셋형 두터운 구제'에 행정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최근 정부가 '고유가 피해지원금'을 선별 지급하며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시작한 것은 올바른 방향타다. 이에 그치지 말고 유가 폭등으로 고통받는 중소 물류업체와 에너지 취약 소상공인들을 위한 전력 요금 보전 등 생활 밀착형 방파제를 더 촘촘히 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선거 직후 예견되는 정치적 폭풍을 정면 돌파할 '조기 영수회담'의 결단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야당 지도부를 초청해 오직 '민생 경제'만을 의제로 삼는 영수회담을 선제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정치적 공방은 국회에 맡기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여야가 따로 없다는 선언과 함께 'AI 전환 지원법'이나 '국가 전력망 확충' 같은 미래 성장동력 법안의 대타협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억강부약'의 실천이자 정치의 본령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가 형편없다면 그 정치는 실패한 것이다. 높은 국정 지지율이나 선거의 결과는 민생의 고통 앞에서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 호르무즈라는 모래늪에 빠진 서민 경제를 구하고, 멤플레이션이라는 날개로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일은 결국 대통령의 절실한 민생 정치력에 달려 있다. 선거 뒤의 폭풍 속에서도 오직 국민의 삶만을 바라보며 실용의 깃발을 흔드는 유능한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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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구글 제미나이]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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