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이안대군 머문 그 저택, 서울 도심에 있다고?

운현궁 사랑채 노안당 전경 사진서울관광재단
운현궁 사랑채 노안당 전경 [사진=서울관광재단]
요즘 안방극장은 아이유, 변우석 주연의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 열풍으로 뜨겁다. 연일 화제를 모으는 극의 전개만큼이나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극 중 이안대군(변우석 분)이 머무는 고풍스러운 저택이다. 화면 속 고결한 기품을 뿜어내는 그곳은 멀리 있는 세트장이 아닌, 서울 도심 한복판 종로에 자리한 운현궁 양관이다. 이처럼 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하는 서울의 한옥 명소들은 특유의 미학과 고즈넉한 분위기 덕분에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결정적 장면을 완성하는 무대가 되어왔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정수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거스르지 않고 지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 창과 문을 단순히 빛과 바람의 통로로 쓰지 않고,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담아내는 액자로 활용하는 '차경(借景, 자연을 빌려 내 정원으로 삼는다)'의 철학이다. 마침 서울관광재단은 신록의 계절 5월을 맞아 K-콘텐츠의 배경이자 차경의 미학, 그리고 묵직한 근현대사를 오롯이 간직한 서울 한옥 명소 4곳을 추천했다. 궁궐에 버금가는 전통 사저부터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가 깃든 근대 가옥, 1960년대 군사정권 시절 세워진 대규모 요정까지. 각 공간이 품은 치열하고도 파란만장한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며 5월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운현궁 안채 노락당 뒷쪽에 운현궁 양관이 빼꼼히 보인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운현궁 안채 노락당 뒷쪽에 운현궁 양관이 빼꼼히 보인다. [사진=서울관광재단]

◆ 조선의 흥망성쇠가 교차한 권력의 중심, 운현궁과 양관

현대적인 빌딩이 늘어선 종로 한복판, 두터운 돌담 너머에 자리한 운현궁은 고종 황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조선 후기 역사의 산실이다. 겹겹이 층을 이룬 기와지붕이 웅장한 기품을 자아내는 이곳은 일반 사대부의 집과는 격이 다르다. 흥선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던 노안당은 국정 쇄신과 섭정의 권력이 집중되었던 정치적 무대였고, 안채인 노락당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졌을 만큼 궁궐에 버금가는 규모와 위상을 자랑한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면 인근 직장인들이 툇마루에 앉아 짧은 휴식을 즐기는 도심 속 오아시스로 사랑받고 있다.

이러한 운현궁 마당 너머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1912년경 일제가 조선 왕실 인사를 회유하고 감시할 목적으로 선대의 사당 자리에 지어준 르네상스 양식의 2층 저택, 운현궁 양관이다. 일본인 건축가 가타야마 도쿠마의 설계로 화려한 아치형 외관과 이국적인 베란다를 갖췄지만, 외벽에 새겨진 오얏꽃(이화, 李花) 문양만이 이곳이 끝내 조선 왕실의 굴욕적인 공간이었음을 조용하고도 슬프게 증언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은 이 이국적인 양관은 굵직한 K-콘텐츠의 단골 무대가 되었다. 최근 '21세기 대군부인'에서 이안대군이 현대로 넘어와 대군부인(아이유 분)과 달빛 아래 애틋한 마음을 나누던 화려한 베란다가 바로 이곳이다. tvN '도깨비'에서 김신(공유 분)과 저승사자(이동욱 분)가 런웨이를 펼치던 대문, MBC '궁'의 황태자 이신(주지훈 분)이 머물던 동궁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지척에 자리한 서울우리소리박물관에서는 판소리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흥선대원군의 발자취를 따라, 이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다채로운 향토 민요를 감상할 수 있다.
 
선운각 한옥마당 전경 사진서울관광재단
선운각 한옥마당 전경 [사진=서울관광재단]

◆ 현대사의 이면을 품은 거대한 요정에서 시민의 쉼터로, 선운각과 봉황각

북한산 우이동 자락에 위치한 선운각은 1960년대 지어진 서울 민간 한옥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고풍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이곳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 정·재계 실력자들의 밀실 정치가 이루어지던 이른바 '고급 요정'으로 지어졌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당시를 대표하던 3대 요정이었으나, 시대의 흐름과 함께 굴곡진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뒤로하고 현재는 누구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한옥 카페 겸 야외결혼식장으로 일반에 완전히 개방됐다. 

입구부터 길게 이어지는 웅장한 돌담과 박석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극 중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고애신(김태리 분)을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미국 공사관 진입로가 바로 이 돌담길이다. 본관 2층 테라스에서 북한산의 유려한 능선을 조망하거나, 한옥 마당의 처마 밑에 앉아 푸른 잔디와 병풍처럼 펼쳐진 산세를 감상하다 보면 묵직한 시대극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듯한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봉황각 뒤로 북한산 봉우리가 보인다 사진서울관광재단
봉황각 뒤로 북한산 봉우리가 보인다. [사진=서울관광재단]
선운각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전혀 다른 결의 역사적 공간, 봉황각과 마주하게 된다. 1912년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세운 곳으로, 3.1운동의 뼈대가 세워진 발상지이자 성지다.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 본연의 결이 살아있는 기둥과 보에서는 헛된 치장보다 민족의 자주를 꿈꿨던 선비의 꼿꼿한 기개가 전해진다. 조용하고 사색적인 분위기 속에 후문 언덕을 50m 오르면 닿는 손병희 선생의 묘역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사진서울관광재단
북촌동양문화박물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사진=서울관광재단]

◆ 근대 자본과 민족의 비극이 교차하는 정심재, 백인제 가옥

북촌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을 오르다 보면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는 웅장한 대문의 백인제 가옥을 만난다. 1913년 당시 한성은행 전무였던 친일파 한상룡이 압록강에서 뗏목으로 실어 온 최고급 흑송을 사용해 지은 근대 한옥이다. 일제강점기 최상류층의 권력과 자본이 집약된 공간으로, 전통 한옥의 틀을 깨고 사랑채와 안채를 복도로 연결해 신발을 벗지 않고도 내부를 오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붉은 벽돌 담장과 유리창, 다다미방 등 당시의 최신 서양 및 일본식 건축 기법이 절묘하게 혼재되어 있다.

이 화려한 가옥은 언론인 최선익을 거쳐 1944년 당대 최고 외과 의사이자 백병원의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의 소유가 되며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백인제 선생이 납북되는 민족의 비극을 겪으면서, 가옥은 부인 최경진 여사와 자녀들이 굳건히 지켜내며 오늘날 우리 곁에 공공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건축적 화려함 이면에 식민지 시대의 씁쓸한 자본주의와 전쟁의 아픔이 공존하는 셈이다.

이러한 독보적인 규모와 압도적인 분위기 덕분에 시대극이나 재벌가의 저택을 그리는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양철 회장(이성민 분)이 막내손자 진도준(송중기 분)을 날카롭게 시험하며 거닐던 저택 '정심재'의 뜰이 이곳이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의 저택 안채로 등장한 것도 공간이 가진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인근 북촌동양문화박물관 2층 테라스에 오르면, 이 모든 역사를 품고 있는 북촌의 기와 물결과 경복궁, 북악산 산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수연산방 사진서울관광재단
수연산방 [사진=서울관광재단]

◆ 당대 문인들의 치열한 예술혼이 깃든 사랑방, 수연산방과 최순우 옛집

성북동 가파른 언덕길에 자리한 수연산방은 한국 단편 소설의 선구자 상허 이태준이 1933년 직접 지은 개량 한옥이다. 당호의 뜻처럼 '문인이 모이는 산속의 집'이었던 이곳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일제강점기 캄캄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 문학의 꽃을 피우려 했던 치열한 예술혼의 무대였다. 구인회(九人會) 소속이었던 정지용, 이상 등 당대 최고 문인들이 밤을 지새우며 문학과 삶을 논했고, 이태준 역시 이곳에 거주하며 수많은 명작을 집필했다.

전통 한옥의 틀을 따르면서도 공간의 기능을 현대적으로 재편한 수연산방의 백미는 단연 안방 앞의 누마루다. 섬세하고 화려한 누마루가 정원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장르를 불문하고 카메라 앵글을 매료시켰다. 영화 '하녀'를 비롯해 JTBC '부부의 세계' 등 여러 작품에서 인물들의 은밀한 만남이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장소로 묘사되어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현재 전통 찻집으로 운영 중인 이곳 방 안에 앉아 은은한 나무 향과 함께 스며드는 봄볕을 맞으면, 일상에 지친 마음이 절로 치유된다.
 
 최순우옛집 뒷뜰 풍경 사진서울관광재단
최순우옛집 뒷뜰 풍경 [사진=서울관광재단]
성북동에는 수연산방과 더불어 한옥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최순우 옛집'도 빼놓을 수 없다. 명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거주하던 집이다. 1930년대 지어진 'ㅁ'자형 구조로, 억지스러운 장식을 배제하고 단정한 선과 나무 본연의 질감을 살린 건축미가 돋보여 정갈한 분위기를 풍긴다. 마당의 소나무와 산사나무, 모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진정한 미(美)를 사랑하고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학자의 맑고 고고한 숨결이 짙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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