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컬럼] 해군의 첫 여군 주임원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대한민국 해군 역사에 의미 있는 장면이 새겨졌다. 해군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성 주임원사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황지현 원사다. 2006년 부사관으로 임관한 이후 훈련소대장과 함정 병과 진급 등 여러 ‘최초’를 기록해온 그는 이제 해양작전본부 주임원사라는 상징적인 자리에 올랐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인사 뉴스가 아니다. 한국 군 조직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신호다.


군은 오랫동안 전통과 규율이 강한 조직이었다. 그 안에서 ‘최초’라는 기록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조직의 기준이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황지현 원사의 등장은 특정 성별이 아니라 실력과 경험이 기준이 되는 방향으로 조직이 이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례다. 실제로 그는 수천 명의 부사관을 양성했고 주요 전투함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력만 놓고 보면 ‘여군 최초’ 이전에 ‘검증된 전력’이라는 평가가 먼저 나온다.


다만 이 한 사례를 곧바로 조직 전체의 완성된 변화로 일반화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개인의 성취는 가능성의 증거이지만 동시에 아직 갈 길이 남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일부 영역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완성’이 아니라 ‘전환’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은 열렸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경로가 아직 충분히 넓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황지현 주임원사 사진연합뉴스
황지현 주임원사 [사진=연합뉴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변화의 방식이다. 인구 감소와 병력 구조 변화라는 현실은 군 조직에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특정 집단의 참여를 제한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곧 능력 기준을 낮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기회가 넓어질수록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기준은 더 정교해진다. 인구 구조 변화는 문을 여는 조건이고, 그 문을 통과하는 기준은 여전히 실력이다. 황지현 원사의 사례는 이 두 흐름이 충돌이 아니라 순서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등장을 ‘선구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구자는 특별한 출발선에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 기준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축적해 온 사람이다. 황 원사는 맡은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성과를 쌓았고 그 결과가 하나의 기록으로 이어졌다. 이는 영웅 한 명이 등장했다기보다, 보통의 노력이 쌓여 기준을 바꾸는 순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성취는 개인의 영광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의 기준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억’의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한 사회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는지는 그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를 결정한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 위에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축적의 과정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보훈 신춘문예다. 아주경제신문이 매년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여는 이 행사는 단순한 문학 공모전이 아니다. 과거의 희생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다.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들,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글로 복원하는 과정이다.


여군 주임원사의 탄생과 보훈 신춘문예는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나는 현재의 성취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억이다. 그러나 두 사건을 관통하는 공통된 축이 있다. 바로 ‘이어짐’이다. 과거의 희생이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선택이 미래의 기준이 된다. 보훈은 과거에 머무는 개념이 아니라 현재를 움직이는 힘이다.


황지현 원사의 길 역시 누군가의 희생과 선택 위에서 가능했다. 군 조직이 조금씩 문을 열어온 시간, 그 안에서 이름 없이 역할을 수행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축적이 있었기에 오늘의 ‘최초’가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취는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공동체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보훈 신춘문예가 던지는 메시지도 같다. 우리는 흔히 영웅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 이름을 가능하게 만든 수많은 무명의 삶은 잊는다. 그러나 국가를 지탱하는 힘은 오히려 그 보통의 삶에서 나온다. 일상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 기록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선택들이 모여 오늘을 만든다.


이런 점에서 보훈은 과거를 기리는 의식이 아니라 현재를 바로 세우는 기준이다.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가 달라진다. 여군 주임원사의 탄생을 단순한 ‘첫 기록’으로 소비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시간과 축적을 이해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지난해 6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회 보훈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수상자와 시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영준씨 김성준씨 서다예 학생 정인씨 정유리씨 정규동씨 황은주씨 유선일씨 사진아주경제
지난해 6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3회 보훈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수상자와 시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영준씨, 김성준씨, 서다예 학생, 정인씨, 정유리씨, 정규동씨, 황은주씨, 유선일씨. [사진=아주경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확장이다. 군에서 시작된 변화는 사회 전반으로 이어진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원칙은 어느 한 조직에만 적용되는 가치가 아니다. 기업, 공공기관, 교육 현장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국 국가 경쟁력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그 기준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억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를 잊은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반대로 과거에만 머무는 사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연결이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선택으로 연결하고, 그 선택을 미래의 기준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6월 보훈의 달은 바로 그 연결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그리고 보훈 신춘문예는 그 연결을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내는 장이다. 글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다시 만나고 현재를 다시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은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된다.


황지현 원사의 한 걸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또 다른 누군가의 출발점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록하는 한 편의 글,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다음 세대의 기준이 된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을 통해 어떤 기준을 세울 것인가. 여군 주임원사의 탄생과 보훈 신춘문예는 서로 다른 장면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선택하며 미래를 준비하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거창하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들이 한 사회의 방향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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