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고 회수하는 기능을 넘어, 산업의 흐름을 읽고 미래를 설계하는 기능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상혁 신한은행장이 내세운 ‘선구안 금융’은 이러한 변화의 방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신한은행이 산업연구원과 협약을 맺고 기업 심사 체계를 재무 중심에서 산업·기술 기반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것은 상징적 장면이다. 이는 단순한 평가 방식의 수정이 아니라 금융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과거의 실적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보겠다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전환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무 지표 중심의 금융은 안정적이었다. 숫자로 검증된 과거를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과 기술, 성장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는 금융은 다르다. 미래를 예측해야 하고, 그 예측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
따라서 ‘선구안 금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 방향만으로는 부족하다.
첫째, 전문성이다. 산업과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번 산업연구원과의 협력은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외부 기관에 의존하는 구조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금융 내부에 산업 분석 역량이 축적돼야 한다. 그래야만 일관된 판단과 장기적 전략이 가능하다.
핵심은 분명하다. 금융이 산업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다시 재무 중심의 안전한 선택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선구안 금융’은 분석 역량이 뒷받침될 때만 유지될 수 있는 구조다.
둘째, 실패를 전제로 한 책임 구조다.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금융은 필연적으로 실패를 동반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선구안 금융은 성공 사례만으로 유지되는 모델이 아니다.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구조 위에서만 지속된다. 이를 위해서는 투자 판단의 투명성과 책임 체계가 명확해야 한다. 내부 의사결정 과정이 기록되고 검증될 수 있어야 하며, 실패에 대한 책임 역시 분명하게 규정돼야 한다.
동시에 과도한 책임 추궁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책임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금융은 다시 보수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책임은 개인을 처벌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선구안 금융은 지속 가능해진다.
셋째, 제도적 정책 환경의 뒷받침이다. 생산적 금융은 금융기관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 차원의 정책과 결합될 때 비로소 작동한다.
장기 투자에 대한 세제 인센티브, 투자 손실에 대한 합리적 처리 기준, 산업 데이터에 대한 접근성 확대 등은 필수적 조건이다. 특히 초기 산업에 대한 투자는 단기 성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책적 지원이 없다면 금융은 다시 단기 수익 중심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생산적 금융은 금융 정책이 아니라 산업 정책과 결합된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돈의 흐름을 바꾸는 일은 곧 산업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넷째, 실행이다. 어떤 전략도 실제 자본의 이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선구안 금융이 단순한 구호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금이 신산업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유망 기업을 발굴하고 투자로 연결하며, 그 결과 새로운 시장과 산업이 만들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돼야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될 때 금융은 비로소 산업의 파트너로 자리 잡는다.
지금까지 한국 금융은 안정성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이는 분명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전환기에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위험을 회피하는 금융에서 위험을 관리하며 성장에 참여하는 금융으로의 이동이 요구된다.
자율적 판단, 전문성 있는 분석, 실패를 감내하는 구조, 정책적 지원, 그리고 실제 자본의 이동. 이 다섯 가지 조건이 함께 작동할 때 선구안 금융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는다.
돈의 흐름이 바뀌어야 산업이 바뀐다. 그리고 산업이 바뀌어야 경제가 성장한다.
이제 금융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과거를 기준으로 안전하게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미래를 향해 위험을 관리하며 나아갈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이제는 돈이 산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산업을 만들어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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