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계엄을 입에 올린 순간, 그는 대통령의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계엄을 논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군사 권력이 헌정을 짓밟던 시대를 피와 눈물로 끝낸 뒤, 우리는 민주주의와 법치 위에 국가를 세운 선진국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사건은 정치적 실패를 넘어, 헌정 질서에 대한 중대한 훼손이었다. 

계엄은 국가 존립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극단적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헌법상 예외 권한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 상태도, 내란 상태도 아니었다. 국회는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사법부는 독립돼 있었으며, 언론 역시 자유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엄이라는 단어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순간, 이는 위기 대응이 아니라 권력 유지에 대한 불안이 빚어낸 선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한 ‘판단 착오’의 문제가 아니다. 헌법 질서를 전제로 한 민주국가에서 계엄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설득과 합의의 언어를 잃은 권력이 선택하는 방식은 언제나 강압적 명령이다. 그날의 계엄 선포는 절제된 이성의 결과라기보다, 통제되지 않은 충동에 가까웠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책임성과는 거리가 멀다.

어제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의 수사 결과 발표는 이 계엄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했는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절차는 정상적 통제에서 벗어났고, 판단은 폐쇄적으로 이뤄졌으며, 그에 따른 정치적·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됐다. 이는 단순한 국정 운영 실패가 아니라, 헌정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의 평가는 이미 내려졌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하위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이는 일시적 여론이나 정치적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한 신뢰 붕괴의 결과다. 계엄 사태는 그 불신이 응축된 상징적 사건이었고, 그의 통치를 역사적 실패로 규정짓는 결정적 장면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인간의 타락을 ‘탐진치(貪瞋癡)’라는 세 글자로 설명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다. 권력에 대한 집착, 비판을 적으로 돌리는 분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 이번 계엄 사태는 이러한 요소가 국가 권력과 결합했을 때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게 됐다.

다석은 또 말했다. 참된 지도자는 밖으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으로 깨어 있는 존재라고.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무제한적 명령권이 아니라, 헌법 앞에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절제력이다. 그러나 그날의 계엄에서는 성찰도, 책임도, 두려움도 찾기 어려웠다.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만이 전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대통령상은 분명하다. 국민은 힘을 과시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헌법과 법치 앞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지도자를 원한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아니라 진실·선의·책임을 국정의 중심에 두는 지도자, 권력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완성을 추구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이제 질문은 국민에게도 돌아온다. 우리는 왜 이런 선택을 허용했는가. 그리고 왜 비슷한 실패를 반복해 왔는가.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깨어 있는 시민의 지속적인 감시와 판단이 있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다석의 말처럼, “사람이 바로 서지 않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

잘못된 통치는 미화돼서도, 망각돼서도 안 된다. 역사 속에서 분명히 단절돼야 한다. 그래야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

계엄은 끝났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시험대 위에 있다. 이번 사태가 분노의 감정으로만 소비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위기의 씨앗을 남기게 된다. 각성과 성찰만이 답이다. 국민이 깨어 있을 때, 권력은 함부로 헌정 질서를 위협하지 못한다.
 
사진아주경제 DB
[사진=아주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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