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게 된 것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했을 때 경험 때문이었다. 청년 마르틴 루터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도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 수도회는 수도 생활의 규율과 원칙 문제로 갈등이 심했다. 수도원은 이 분쟁의 해결과 수도원의 자율성 확대를 청원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루터는 학문적 성실성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아 대표단에 뽑혔는데 그의 나이 27~28세였고 1510~1511년경의 일이었다. 루터의 이 로마 여행은 가톨릭에 맞서는 기독교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로마 성지 순례의 은혜가 아니라 그가 경험한 실망과 절망 때문에.
루터는 일행과 함께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출발하여 독일 남부와 스위스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 볼로냐, 피렌체 등을 거쳐 걸어서 로마로 갔다. 두 달 이상이 걸린 여행은 로마까지 1200㎞ 넘는 거리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겪었다. 루터 일행은 험난한 산맥을 넘으며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기도와 찬송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다. 가는 길에 성당이나 수도원을 만나면 그곳에서 숙박하고, 가끔은 순례자 숙소에서 지냈으며, 때로는 구걸하거나 수도회의 추천서를 보여주면서 민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루터는 추위와 배고픔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단련 과정으로 보았다. 로마에 가면 큰 영적 은혜와 공로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어려움을 견디며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고 로마에 도착했다. 도착 후 로마에 4주 정도 머물렀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로마에서 4주 동안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온갖 인간 사회의 추악한 꼴들을 다 보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루터가 결정적으로 교회에 대해 또 교황에 관해 갖고 있던 생각을 바꾸게 했다. 그는 로마에서 무엇을 경험했나?
루터는 로마에 체류하는 동안 성지 순례자이자 수도사로서 여러 예배 의식들을 체험했다. 대개 순례자들은 로마에 가면 화려한 성당들을 순례하고 성인들의 유골이나 십자가 파편 혹은 성물을 참배한다. 이를 통해 은총을 얻는다고 믿었다. 또 대성당 미사에 참석하고 특정 성당을 순례하거나 그곳에서 기도하면 연옥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믿는 면벌 행위를 하기도 했다. 루터도 이러한 전례를 체험했다. 그러나 로마에 머물면서 그는 깊은 회의와 공허함에 빠졌다.
로마를 방문하면 당시 순례자들은 으레 ‘성 스칼라 산타(Scala Sancta·거룩한 계단)’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기도하면서 면죄의 축복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그 계단을, 사람들은 예수가 빌라도 법정에 끌려갈 때 오르내렸던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믿었다.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하면 연옥의 형벌을 단축하는 은총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많은 순례자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다. 루터도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조부모의 영혼이 연옥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루터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것이 진정 영혼을 구하는 일인가?’
“나는 로마의 성스러운 계단을 무릎으로 오를 때 아무런 평안을 얻지 못했다.” “로마는 나의 신앙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믿음이 아닌 어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심한 회의에 빠졌다. 그 순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이 경험은 후에 형식적인 의식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진정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깨달음을 얻는 시작점이 되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성직자들의 부패, 타락, 세속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성직자들의 사치와 돈으로 공로를 사는 관행을 목격하고 “로마는 거룩한 곳이라기보다 바벨론 같다”고 했다. 경건한 체험을 기대하고 갔던 로마에서 본 타락한 도시의 모습은 루터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로마 여행 6년 후인 1517년, 루터는 교황청과 신앙에 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서 세상을 바꿔 놓을 논쟁을 시작했다. 교황청과 위험하고도 긴 싸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면죄부와 교황권을 비판하면서 루터는 ‘로마의 타락’을 증거로 들었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에서 로마를 바벨론에 비유하며 부패한 교황청을 비판하였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로마 위에 세워져 있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죄와 부끄러움과 타락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곳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찾기 어려웠다.”
타락한 로마
당시 로마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도시 중 하나였고 성직자, 순례자 그리고 관료들이 몰려드는 중심지였다. 성스럽고 화려하고 거대한 도시의 뒷골목에는 더러운 시궁창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는 수천 명의 매춘부가 있었고, 성직자들도 그들의 단골 고객이었다. 루터는 “로마에서 나는 사제들이 술과 여자에 빠져 타락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미사를 장난처럼 집전했고, 밤에는 매춘부들과 어울렸다”며 ‘성직자들의 방탕’에 큰 충격을 받았다.
루터는 결국 힘들게 간 로마에서 교황청이 타락한 정치 권력기관이라는 인상만 받고 성과 없이 돌아왔다. 교황은 전쟁 준비와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 문제로 바빠서 루터 일행을 만나줄 시간이 없었다. 교황청의 행정 관료들을 만났으나 그들을 통해 무관심, 부패한 관료주의를 경험했다. 청원 문제 해결에 신앙과 경건함보다는 권력과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을 체험하고 좌절했다. 모든 청원서에 각종 수수료가 붙었고 추기경, 서기관, 대리인에게 주는 선물과 봉사료가 필수적이었다. 금전적 헌납 없이는 문서 열람도 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로마에 갈 때 천국을 기대했으나 돌아올 때는 지옥을 본 느낌이었다”고 했다. 루터는 말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마에 가는 길에 경건을 배웠고, 로마에 있는 동안에 의심을 배웠으며, 돌아오는 길에 절망을 배웠다.” 이 절망과 신앙적 상처는 훗날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면죄부와 종교개혁
루터가 로마를 방문할 무렵,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로마는 당시 인구 5만명으로 다른 대도시 베네치아나 밀라노보다 훨씬 작았지만 교회 덕분에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고 유럽 권력의 중심이었다. 성당, 그림, 조각, 공원 분수 등으로 도시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루터는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것은 순례지에서의 불쾌한 상업 활동이었다. 후에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몰아내신 예수님처럼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황제는 교황을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대가로 교황은 황제를 신성하게 임명된 세속군주로 합법화하며 모든 신민이 황제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로마는 교황이었고 교황은 곧 교회였다. 추기경과 주교들은 모든 특권을 누리며 부귀와 사치 속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는 여러분은 죄인이고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도록 정죄받았지만 회개하고 기부하고 순례를 가고 선행을 하고 계속해서 돈을 내야 한다고 겁을 주었다. 임종을 앞두고 사제에게 임종 의식을 청한다면 사제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나 수도원에 담보로 남겨두라고 권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에 대가가 따랐다. 주교나 추기경이 되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작위 매각은 교황에게는 수입원이고 구매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 중세 교회는 한때 독일 땅의 약 절반을 소유했다. 주교직을 얻는 데 신학 공부가 필요치 않았고 성직 안수도 필요 없었다. 돈만 있으면 그것만큼 안전하고 수익성 있는 투자처가 없었다. 왜냐하면 착취할 수 있는 노동인구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성직을 사는 것은 경건함이나 신을 섬기는 진지한 열망이 아니라 안정되고 높은 사회적 지위, 풍요로운 삶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루터 이전에도 교회의 이러한 세속화와 상업화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으나 모든 선한 의도와 개혁 노력은 늘 실패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편리한 포장재에 담아 고가에 팔았다. 돈벌이에 혁신적 발명이 넘쳐났다. 그중 하나가 1476년에 신학자 레이몽드 페로디(Raymond Peraudi·1435~1505)가 발명한 ‘죽은자를 위한 면죄부’였다. 이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돈을 내면 연옥에서 체류하는 기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은 이 발명품에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축복했다. 교황과 추기경, 주교들의 재정적 필요성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교개혁은 부조리에서 시작되었다.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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