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필자가 광역자치단체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시는 시의원으로부터 시정감사를 받는다. 모 시의원이 공무원들을 몰아세우다, 점심시간이 되어 기자들이 감사장에서 철수하면서 카메라가 보이지 않자, 그 시의원의 태도가 온화하게 돌변하면서, 야당 소속의 시의원과 공무원들에게 자신이 심하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밥을 산다는 것이었다. 작금의 국정 청문회를 보면서 이 일이 기억의 편린으로 떠오른다. 비록 광역자치단체의 일이지만, 시정이나 국정이나 뭐가 다를까?
청문회장을 지켜보면 전쟁터와 같다. 카메라 앞에 선 의원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증인을 닦달한다. 상대 진영의 의원들은 그 증인을 옹호한다. 서로를 향해 욕설과 조롱이 오가고, 국민 앞에서는 권력과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 보인다. 언론은 이를 생중계하며 시청률을 올리고, 국민은 그 앞에서 분노하거나 실망한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풍경은 전혀 다르지 않을까!
카메라 불빛이 꺼지면, 날 선 말들을 주고받던 이들이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검사와 국회의원을 가리지 않고 지연, 혈연, 학연의 끈을 따라 다시 합종연횡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낮에는 국민을 위하는 듯 치열하게 싸우던 자들이 밤에는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끼리’의 생존을 확인한다. 그 결과는 뻔하다. 국민은 늘 피해자이고, 권력은 늘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챙긴다.
이러한 모순이 한국 정치의 오래된 병폐이다. 정치인은 ‘견제와 균형’을 외치며 정의로운 투사인 양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국민의 눈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는 특권을 지키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된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정의의 심판자라 포장하지만, 권력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줄을 대고 기득권을 공고히 한다. 언론은 이를 드라마처럼 포장하며 흥행의 소재로 소비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늘 판을 뒤엎는 순간에서 새 길을 열어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억해 보자. 그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다. 지연, 혈연, 학연의 사슬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기득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국민만을 바라보며 정치를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상징처럼 남아 있다. 노무현은 지금도 개혁 정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은 단지 한 시대의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정치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가늠하는 준거가 된다. 오늘날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개혁의 길은 순탄치 않다. 개혁의 발목을 잡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정치가 국민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느냐가 시험대에 오른다.
정치는 결코 몇몇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 있다. 권력자들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국민을 의식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국민은 여전히 무대 밖의 관객으로 머물러 있다. 투표 때만 참여하고, 일상이 되면 정치와 단절한다. 그렇게 방관하는 순간, 권력자들은 더욱 마음 놓고 나라를 제 뜻대로 주무른다. 선거 때가 되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큰절을 올리는 국회의원 출마자들, 우스운 일이다. 사실 국회의원도 다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담합과 야합을 전문으로 하는 국회의원이 과연 없을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국민이 정치의 주인으로서 끝까지 감시하고 심판해야 한다.
검찰 개혁은 시대적 소명이었고, 결국 기소와 수사는 분리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 기분 좋다”라고 할 일이다. 그러나 개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회를 누가 개혁할 것인가? 국회의원의 진짜 천적은 국민의 표심이다. 천적의 천적을 찾다 보면, 다시 국민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나라를 팔아 먹어도 XX당’이라는 식의 막무가내가 통용되는 이유도 국민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이 표심으로 심판할 때, 권력자들은 비로소 국민을 두려워한다. 자연에서 개구리는 천적인 뱀을 두려워한다. 상위 포식자를 의식하는 두려움이 생태의 균형을 지킨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국회의원은 검찰을, 검찰은 국회의원을, 그리고 모두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기억하자.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 포식은 폭주가 되고, 약자는 늘어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목표는 ‘몇몇 잘난 사람의 권력’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평범한 다수가 제 권리를 행사할 때, 권력은 비로소 작아진다.
청문회의 욕설과 분노가 끝나면, 권력자들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며 웃는다. 그러나 국민이 깨어 있는 순간, 그 술잔은 더 이상 달콤하지 않다. 판을 갈아엎고 새 질서를 짜는 힘은 오직 국민에게서 나온다. 국민의 분노와 희망을 정치의 동력으로 삼을 때, 권력의 가면극은 끝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무대가 열릴 것이다.
정치는 늘 국민을 앞세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뒤로 제쳐둔다. 선거철이면 온갖 약속과 공약이 쏟아지지만, 선거가 끝나면 권력자들은 곧 서로의 이익을 맞바꾸며 국민을 잊는다. 결국 민주주의를 살리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국민의 눈과 귀, 그리고 행동이다. 정치가 권력자들의 연극으로 전락할지, 아니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무대로 다시 서게 될지는 오직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인간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바로 국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나라이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부패한다. 그래서 국민소환제, 정치자금의 투명성, 이해충돌 방지가 강화되어야 한다. 국민이 바뀌면 표가 바뀌고, 표가 바뀌면 권력이 바뀐다. 표를 받아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려와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주문으로 몰표를 몰아주며, 스스로의 견제권을 포기해 왔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우리는 그들과 남이 되어 냉정하게 골라야 한다. 법 앞에서도 남이고, 원칙 앞에서도 남. 이때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다. 천적의 천적, 또 천적의 천적인 국민이 바로 그 권력의 최상위가 되어야 한다. 권력이 국민을 두려워할 때, 정치의 균형은 지켜지고 민주주의는 호흡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주권재민(主權在民)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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