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간 관세 협상이 한달 반째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일본 수준의 협상안을 수용하라고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 7월 말 양국이 큰 틀의 무역 합의에 도달했지만, 대미 투자 구조와 수익 배분 방식을 둘러싼 이견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14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양국은 지난 7월 합의를 통해 한국이 총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는 대신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다.
그러나 △직접투자 비중 △투자 대상 선정권 △이익 배분 방식 등 핵심 쟁점에서 의견 차가 커 합의가 지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난 12일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급히 미국으로 파견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을 언급하며 한국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한국은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당시 관세 협상에 서명하지 않았다”며 “관세를 낼 것인지, 합의를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은 이미 계약서에 서명했다. 유연함은 없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일본과 같은 조건을 수용해야만 관세 인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다.
반면 우리 정부는 일본식 모델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 경제 규모가 일본보다 작고, 대규모 외화 유출 시 외환시장 충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준기축통화국일 뿐 아니라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고 있어 안정성이 확보돼 있지만, 한국은 현재 한·미 통화스와프가 없어 리스크가 훨씬 크다.
또한 투자 재원을 마련하려면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이 국내외에서 채권을 발행하고 이를 달러로 환전해야 하는데, 이 경우 금융기관의 자본비율이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정부는 투자처 선정에 한국의 동의권을 보장하고, 투자금 분할 집행을 원칙으로 하는 방안을 고수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3500억 달러를 한 번에 집행할 수는 없다”며 “대미 투자펀드는 국내가 감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운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국익 우선 원칙을 강조하며 미국 압박에 선을 긋고 있다. 그는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고, 합리성과 공정성을 벗어난 협상은 하지 않는다”며 “어떤 이면 합의도 없다”고 못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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