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새장을 비우고 새로운 새를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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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1-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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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⑬ 아이스브레이커, 개혁성향 왕양 상무위원(2)

왕양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사진=신화통신]

*등롱환조(騰籠換鳥) : 새장을 비우고 새로운 새를 채워라. <왕양(汪洋)>
*봉황열반(凤凰涅槃) : 봉황은 자신을 불사른 후 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난다. <시진핑(習近平)>

―――――'G2' 중국의 권력 4인자와 1인자가 가장 즐겨 쓰는 사자성어

◇ 아이스브레이커(Ice Breaker)

1989년 6월 4일 비극의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생했다. 그 날 이후 중국의 개혁은 빙하기에 진입했다. 그 많던 사영기업과 개체호(個體戶·영세 자영업자)는 꽁꽁 얼어붙은 시장의 땅굴 속에서 움츠린 채 기나긴 동면기를 겪어야 했다.

반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동토는 해빙기를 맞고 있었다. 동독은 서독에 흡수돼 자취도 없이 녹아버렸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갈기갈기 해체됐다. 동유럽 각국은 귀신이 몸을 흔들어 형체를 바꾸듯 자본주의 체제로 변신했다. 마지막 남은 사회주의 대국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대륙의 얼음장은 누가 깰 것인가?

“깨어나라! 퉁링(醒来! 銅陵)”

1991년 11월 14일 안후이(安徽)성 남부 소도시 퉁링(銅陵)의 일간지 퉁링보((銅陵報)의 1면 전면을 꽉 채운 기고문의 제목이다. 기고자는 36세의 퉁링시장 왕양. 그는 기고문에서 "일체의 사상을 해방하라! 일체의 부패, 고착, 봉건쇄국 사상관념을 수술하라!"고 외쳤다. 

이 겁도 철도 없는(?) 소도시 시장의 어마어마한 ‘정치 도박’은 빙하의 대륙을 진동시켰다. 당중앙 기관지 인민일보는 ‘퉁링 개혁’이라는 제하의 평론(사설)을 실었다. '깨어나라 퉁링'은 얼음처럼 차갑게 경색된 장벽을 깨뜨려 일거에 국면을 전환하는 ‘아이스 브레이커’로 작동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듬해 1992년 1월 18일(길일) 남행 특별열차에 노구를 실었다. 그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여정이 개시된 것이다. 톈안먼 사태로 2년 반 넘게 동결되었던 대륙의 얼음장이 쩍 하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왕양의 ‘아이스 브레이크’는 정확히 2개월하고 나흘 후였다.

88세의 키 작은 최고 영도자는 특별열차가 안후이 북부 중심도시이자 왕양의 고향 쑤저우(宿州) 인근 벙부(蚌埠)역에 이르자 정차를 명했다. 그리고 퉁링시장 왕양을 불렀다. 덩은 앳된 얼굴의 왕양을 ‘아이 시장’이라 부르며 그의 과감한 개혁·개방 정신을 극찬했다.

개혁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고심하던 덩샤오핑에게는 ‘깨어나라 퉁링’ 으로 대륙의 얼음장을 깨뜨려 마음을 열고 분위기를 살린 아이스브레이커, 왕양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웠으리라!

그날 이후 왕양의 관운은 승승장구, 일취월장, 보보고승(步步高升), 붕정만리(鵬程萬里)였다.

1993년 초, 38세의 왕양은 안후이 부성장(당시 전국 최연소 부성장)으로 일약 승진했다. 모험과 개혁을 좋아하는 왕양의 특장 중 하나는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이다. 퉁링시장 재직시 중앙당교 통신교육학원 당정관리과에 편입해 학사 학위를 받은 왕양은 안후이성 부성장 재직 시에는 중국과학기술대학원(한국의 KAIST격, 안후이성 성도 허페이(合肥) 소재) 관리과학과 과정을 이수하여 공학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 국가계획위 부주임(한국의 기획재정부 차관격), 2003년 국무원 부비서장(국무조정실 차장격)을 지냈다.

2005년, 만 50세 왕양은 세계최대 도·농 복합 거대도시(면적 8.1만㎢, 인구 3100만명․ 남한 면적의 8할, 인구의 6할 이상) 충칭(重慶)직할시 당서기에 부임했다.

◇새장을 비워 새로운 새로 채워라―등롱환조

2007년 중국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중 전회)에서 왕양은 중앙위원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고 두 단계나 승진하여 정치국원에 올랐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혁 성향의 왕양은 개혁·개방의 선행마이자 중국의 제1 부성(富省)인 광둥(廣東)의 기수, 즉 광둥성 당서기로 등극했다.

왕양은 등롱환조(騰籠換鳥), 새장을 비워 새로운 새로 채우 듯,  양적 확대에 주력해왔던 중국을 강력한 구조개혁을 통해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자며 개혁을 밀어붙였다.

예산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낙후지역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번화한 대도시로 이주하는 낡은 호구제도를 혁파했다. 값싼 위탁가공이나 노동집약적 낙후산업에 집중되었던 광둥성 경제를 첨단과학기술과 지식산업 경제로 전환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시대에 뒤떨어진 부실기업을 억지로 살려두면 안된다며 대대적인 국유기업의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GDP 성장률을 8%대로 지킨다는 '바오바(保八)'에 대해, "GDP 수치는 별로 중시하고 있지 않다", "불경기에 성장이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폭탄성 발언을 이어가며 대대적인 국유기업의 구조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왕양의 개혁은 ‘광둥 모델’로 치켜세워졌다.

그러나 빛이 환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인가? 중국판 리버럴리스트 왕양에게는 지지자도 많았지만 반대파도 많았다. 왕양은 ‘등롱환조’, ‘행복한 광둥(幸福廣东)’은 구호만 요란했지 ‘피땀공장’(血汗工場), ‘외지노예노동자’(外地奴工), ‘흑사회 천하’ 라는 악명 높은 광둥의 근본적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왕양의 최대 라이벌은 이른바 ‘태자당’의 대표주자였던 보시라이(薄熙來, 후일 부패혐의로 실각, 종신형 복역중)충칭(重慶)시 당서기였다. 차기 당 총서기를 노리던 보시라이는 마오쩌둥(毛澤東 )의 전통 사회주의 계획경제로의 회귀를 추진하는 ‘충칭모델’을 내세웠다.

왕양은 “떡을 나누는 것보다 키우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보시라이는 “떡은 먼저 공평하게 나눠야 더 커진다” 라는 치열한 21세기'중국판 보혁' 논쟁을 펼쳤다.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 입성이 점쳐졌던 왕양은 보시라이의 낙마에 따른 반대파의 집중견제로 국무원 3인자인 농업과 대외무역 빈곤대책 담당 부총리로 승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자신의 중국사회의 환골탈퇴 촉구 슬로건인 ‘봉황열반, 욕화중생(凤凰涅槃 浴火重生, 봉황이 자신을 불사른 후 더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난다, 시주석이 전매특허처럼 즐겨 쓰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며, 신창타이(新常態·뉴노멀)정책과도 코드가 맞는 ‘등롱환조’의 왕양을 중용했다.

왕양은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냈으며, 결국 지난해 10월 개최된 제19차 당대회에서 대망의 '중국정치7룡(정치국상무위원)'으로 웅비했다. 당서열 4인자가 정치협상위원회(중국 최고 정책 자문회의) 주석을 맡게 되는 지난 25년간의 패턴에 따라 왕양은 정협 주석에 내정된 것이 확실시된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중국에 가까운 나라는 북한보다 한국

시진핑 주석 2기의 신임 정치국상무위원중 대표적인 지한파는 평창올림픽(2월 9일 개최)을 계기로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올 한정(韓正), 그리고 왕양이다.

왕양은 광둥성 서기시절인 2009년 11월 외교통상부의 초청으로, 부총리 시절인 2015년 1월 '중국관광의 해'를 계기로, 모두 두 차례 방한한 바 있다. 특히 3년 전 이맘때 방한한 왕양에게 삼성·현대차·LG 등 한국의 3대 그룹 총수들이 찾아가 각각 단독 회동을 가지는 등 재계의 환대를 받아 ‘왕양 신드롬’까지 일어났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반면 왕양은 북한을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왕양이 단독으로 북한 인사와 접촉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다. 개혁·개방 성향이 농후한 왕양이 봉건·폐쇄 사회 북한에 호감을 품을 하등의 이유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12월 2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왕양이 방중한 야마구치 나쓰오(山口那津男) 일본 공명당 대표에게 북·중 관계가 과거 ‘혈맹관계’에서 핵 문제로 인해 이제는 ‘대립관계’가 됐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북·중이 혈맹관계라서 한·미 동맹만으로 부족하니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진주등 일본 군사력의 도움이 필수라는, 속보이는 궤변을 펼치던 일본 언론은 중국 권력서열 4위 왕양이 북·중 관계를 '대립'으로 표현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중국 역대 한·북·일·미 관계변화 추이[표제공=강효백 교수]


사실 북·중 관계는 1992년 한·중 수교와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혈맹 관계’에서 ‘전통적 우호관계’로 강등되더니, 2009년 북한 2차 핵실험 직후 ‘단순수교’ 관계로 급전직하하다 전통적 우호관계로 잠시 회복햇다. 하지만 시진핑 –김정은 시대 이후 다시 단순수교로 전락, 최근에는 중국 권력4강 왕양이 공언하는 ‘대립 관계’로까지 얼어붙은 상황이다.

한중, 북중 정상회담 횟수 비교. [표제공=강효백 교수]


실례로 21세기(2000년~2018년 2월 예정)까지 중국 현 정치국상무위원 7인의 방한 횟수는 17회이나 방북횟수는 5회에 불과하다.

또한 2013년 시진핑 시대 이후 한·중 정상회담은 11회 열렸으나 북·중 정상회담은 전무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6일 독일 베를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11월 11일 베트남 다낭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 12월 14일 국빈 방중에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 등 취임 8개월간 세 차례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전화통화 제외).

이처럼 ‘경제는 온탕, 정치는 냉탕’으로 잘못 각인되어온 한·중관계는 사실 북·중관계보다 경제·사회·문화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도 훨씬 긴밀해진지 이미 오래다.

심지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배치) 배치 문제로 한동안 양국 관계가 경색됐던 때도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한·중 관계는 북·중 관계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표1, 2 참조).

요컨대 중국에 가까운 나라는 한국보다 북한이라는 인식은 1970년대 냉전시대 사고방식에 기반한 오래된 잔상이거나 위험한 착각이다. 중국의 대외전략에 관해 한·중 관계에 대한 환상도 버려야 하지만 중국 최고지도층이 대립관계라고까지 공언하는 북·중 관계를 과대평가함으로써 한·중간 신뢰를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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