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7] 누가 겨울에 러시아를 제압했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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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0-1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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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의미 축소된 타타르지배

[사진 = 몽골군, 러시아정벌도 (몽골 국립 박물관 소장)]

지금도 세계 강국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가 과거 240년 동안이나 몽골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세계사에서도 이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거기에는 다분히 서구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조명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더욱이 러시아 역사는 가급적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아예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많은 러시아의 역사학자들, 특히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은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240년의 세월을 외면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은 물론 몽골의 지배가 러시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그 것을 그저 힘센 야만인에게 어쩔 수 없이 당했던 ‘멍에’ 같은 수준에 묶어 두려했다.

그래서 러시아 역사는 몽골에게 지배받던 이시기를 타타르 이고, 즉 타타르 멍에라고 부르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몽골에 영향을 미쳤던 20세기 70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과거 자신들에게 멍에를 안겨준 원초적인 인물 칭기스칸을 폄하(貶下)하는 작업을 꾸준히 계속해왔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친 몽골의 러시아지배가 과연 어께에 멘 가벼운 짐 정도인 멍에 수준일까? 그 것은 아닌 것 같다. 몽골의 러시아 정벌과 지배 과정을 살펴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전방위(全方位) 정복전쟁 착수

[사진 = 오고타이, 전(全)방위 정복전쟁]

2차 금나라 원정을 통해 장강(양자강) 이북의 중국 대륙을 거의 손에 넣은 오고타이 정권은 카라코룸에 도성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동서에 걸친 대 원정을 재개했다. 몽골의 푸른 군대는 동쪽으로 두만강유역의 여진족 동하(東夏)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포선만노를 제압했다. 또 이미 1231년에 손을 댄 한반도 장악을 위한 對고려전쟁도 계속해 나갔다. 이와 함께 40년 이상 끌어갈 남송 전쟁에도 착수했다. 말하자면 몽골은 오고타이 대칸 즉위와 함께 전방위(全方位) 정복전쟁에 나선 것이다.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몰아친 광풍

[사진 = 바투에게 정벌된 수즈달(러시아 연대기 세밀도)]

이때의 정복전쟁은 칭기스칸 시대의 전쟁과 성격상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칭기스칸의 정복전쟁은 대부분 응징의 의미가 바닥에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고타이 이후의 전쟁은 정복과 지배를 염두에 둔 전쟁의 성격이 강했다. 이 정복전쟁 가운데 세계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서쪽 러시아와 동유럽으로 몰아친 광풍이었다.

▶13년 뒤 재개된 루시와의 격돌
칭기스칸 통치 당시 제베와 수베타이가 이끌었던 몽골군과 루시 즉 러시아의 첫 격돌이 있었다. 러시아 지역에 대한 몽골의 본격적인 정벌은 그 13년 뒤인 1,236년에 시작됐다. 칭기스칸의 호레즘 원정에 동참했다가 귀환하지 않고 카자흐 초원 동반부에 눌러 앉았던 큰아들 주치는 이 지역에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사진 = 바투 추정도]

장차 24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하게 될 킵차크한국의 바탕이 되는 주치 울루스(나라)의 터를 닦은 것이다. 오고타이가 대칸에 올랐을 때 이미 주치는 사망하고 없었고 이 지역은 그의 둘째 아들 바투가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통치하고 있었다.

▶정벌군 총사령관은 바투

[사진 = 바투 초상화]

몽골 서방 정벌군의 총사령관은 바로 이 바투가 맡았다. 실질적인 장손 자격으로 지휘를 맡은 것이다. 여기에는 칭기스칸 가문의 모든 지파 대표들이 포진됐다. 바투의 형인 오르다와 동생인 베르케, 오고타이의 아들 구육과 손자인 카이두, 차가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와 손자인 부리, 툴루이의 아들 뭉케 등이 그들이었다.
 

[사진 = 몽골군, 서방 정벌도]

이제 정복전쟁은 칭기스칸과 아들 대(代)에서 손자 대(代)로 그 몫이 넘겨지고 있었다. 칭기스칸 시대의 역전 노장 수베타이는 여전히 살아서 이들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했다. 원정군은 각 천 호로부터 10명 가운데 2명씩 꼴로 차출해 구성했다. 차출된 병사들의 상당수는 10대 후반의 소년 병사들이었다. 젊고 민첩하면서도 지휘관의 말에 잘 복종하는 이들로 구성된 원정군은 강한 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킵차크 초원 볼가르 쉽게 제압
첫 해 원정의 목표는 킵차크 대초원지대를 평정하는 일이었다. 1,236년 서방 원정군은 우랄강을 건너 킵차크 대초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킵차크란 카스피해와 흑해 그리고 카프카즈 일대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도나우강에 이르는 광대한 서북 유라시아의 대초원지대를 말한다.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투르크계의 유목민들이 크고 작은 집단을 이룬 채 갈라져 살고 있었다. 몽골군의 첫 희생자는 볼가 강변에 사는 볼가르인들이었다.
 

[사진 = 몽골 기마병(삽화)]

몽골군은 첫 상대인 이 볼가르를 쉽게 제압했다. 이어 몽골군은 킵차크인들 역시 어렵지 않게 굴복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을 기마 군단으로 흡수했다. 전쟁을 하면서 군사가 늘어나고 힘이 더 강해지는 몽골군의 특성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원정 출발 당시 5만 명 남짓 되던 몽골군은 순식간에 15만 명으로 세배나 늘어났다. 다음 차례는 동북쪽에 있는 루시(러시아)였다.

▶학설 분분한 루시의 기원
첫 번째 목표를 이룬 몽골군은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다. 당시까지 루시로 불리어지던 러시아는 힘이 한곳으로 모아져 있지 않고 여러 개의 공국(公國) 나뉘어져 분열과 반목을 계속하고 있었다. 루시는 핀란드어로 ‘노를 젓는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9세기 북유럽 해양민족인 노르만인들이 건너와 루시를 세웠다는 주장을 비롯해 그 기원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과 주장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러시아의 학자들은 6세기를 전후해 루시족이 키예프를 중심으로 성장을 구가해 왔다는 점에서 노르만인들이 오기 훨씬 전부터 루시라는 고대 러시아 국가가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어원은 키예프에 있는 로시 또는 루시라고 불리는 강의 이름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된 루시

[사진 = 몽골군 서정(西征)도 (집사)]

아무튼 루시는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때 성장을 구가하기도 했으나 중앙 집권화 된 국가는 형성하지 못하고 여러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국(公國)이란 군주가 아닌 공후가 다스리는 소국(小國)을 말한다. 특히 루시의 중심역할을 하던 키예프가 점차 힘이 약해지면서 해체의 길을 걷고 있는 틈을 타 킵차크 지역의 투르크 종족들까지 자주 침공해오면서 괴롭혔다.

이들과 힘들고 어려운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키예프의 루시의 힘은 더욱 약해지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여러 공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내분과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아닥친 몽골군의 이 지역 공격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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