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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화보]후베이성 우한, 과거와 근현대가 함께 고동치는 도시

입력 : 2017-06-22 16:22수정 : 2017-06-2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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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화보 천커(陳克) 기자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은 중국 중부 지역 중에서도 ‘심장’에 위치해 있다. 우한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이, 남쪽으로는 광저우(廣州)가, 서쪽으로는 청두(成都), 동쪽으로는 상하이(上海)가 모두 비슷한 거리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창장(長江)과 한강(漢江)이 이곳에서 만나 우창(武昌), 한커우(漢口), 한양(漢陽)으로 우한을 삼분(三分)한다. 고대에는 창장을 따라 서쪽 위로는 파촉(巴蜀), 동쪽 아래로 오월(吳越),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거슬러 예섬(豫陜)에 이르고, 동정호(洞庭湖)를 지나 남쪽으로는 상계(湘桂)에 이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우한은 ‘구성통구(九省通衢)’라는 별칭이 있었다. 오늘날의 우한은 창장 황금수로와 베이징-광저우를 잇는 징광(京廣)철로의 대동맥이 만나는 곳으로서, 내륙 최대의 수륙교통 중심지이자 중부 지역의 핵심 도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우한은 고대 형초(荊楚)문화가 기원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우한에는 형초문화 특유의 걸출한 능력과 불굴의 의지를 갖춘 사람들이 많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나면서 경제적 중심지로도 부상했다. 또 우한에서 처음 시작된 우창(武昌)봉기는 신해혁명에 신호탄을 울리며 중국의 근대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황학이 날아오르는 서정과 낭만의 공간
“오랜 친구는 황학루를 떠나 아지랑이 일고 꽃피는 삼월 양주로 가네(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이 쓴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배웅하며)>는 중국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황학루는 창장 남쪽 강가의 우창 서산(蛇山·사산) 정상에 위치해 있다. 황학루는 우한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면서 후난(湖南)성의 악양루(嶽陽樓), 장시(江西)성의 등왕각(滕王閣)과 함께 ‘강남(江南) 3대 명루(名樓)’로도 꼽힌다.
기록에 따르면 황학루의 원래 위치는 우창 서산의 황학 기두(磯頭·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한 면이 강가와 맞닿은 자갈밭) 부근으로, 삼국시대 동오(東吳) 황무(黃武) 2년(223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황학루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 중 산에서 명칭이 비롯됐다는 설은 당나라 때 <원화군현도지(元和郡縣圖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손권이 하구(夏口)에 고성(故城)을 짓던 것을 두고 “성의 서쪽으로는 큰 강과 잇닿고, 강의 남쪽 모서리는 기두를 누각으로 삼으니, 이를 황학루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손권은 ‘무(武)를 통해 나라를 통치(治国)하고 번성(昌)하게’ 하기 위해(우창이라는 명칭의 유래) 성을 쌓아 수비를 하고, 누각을 지어 멀리서 적의 동향을 조망했다. 이 때문에 황학루는 어느 정도 군사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
황학루는 당나라에 이르러 점점 문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변해 갔고, 문인들은 이곳에서 후대에 오랫동안 회자되는 여러 걸작을 탄생시켰다. 특히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가 ‘황학루(黃鶴樓)’를 통해 “옛 선인 오래 전 황학 타고 떠난 뒤, 여기에는 비어있는 황학루만 남았네. 이미 떠난 황학은 다시 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 년 동안 빈 하늘을 오가네(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고 읊은 이후에는 그 명성이 더욱 자자해졌다.
이 밖에도 이백, 백거이(白居易), 왕유(王維), 이상은(李商隱), 두목(杜牧)을 비롯해 후대의 소식(蘇軾), 육유(陸遊), 악비(岳飛), 문천상(文天祥), 장거정(張居正), 임칙서(林則徐) 등의 여러 문인 대가들이 황학루를 주제로 아름다운 시편을 여럿 남기면서 황학루에는 낭만과 서정성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빈번했던 전쟁 탓에 황학루는 수없이 훼손됐다가 재건되는 등 꽤나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는 7번이나 소실됐고, 재건과 수리만 10번을 거쳤다. 마지막 누각은 청나라 동치제 7년(1868년) 때 지어졌다가 광서제 10년(1884년)에 다시 소실되었다. 이후 근 100년 간은 재건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황학루는 1981년에 재건을 시작해 1985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새롭게 태어난 황학루는 높이 51.4m의 5층짜리 누각이다. 꼭대기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누각 전체가 황금색 유리 기와로 치장되어 겉모습이 장엄하기 그지 없다. 각 층은 대형 벽화와 주련(柱聯) 및 각종 문화재 등으로 꾸며져 있다.
황학루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우한에 있는 세 진(鎭)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유유히 흐르는 창장과 1957년에 건설되어 우창과 한양을 잇는 창장대교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고속철도가 바람을 가르며 창장대교 위의 징광철로를 따라 황학루 앞을 지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와 현대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모습에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온다.
 

황학루와 창장대교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모습은 우한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사진= IC 제공]

신해혁명 우창봉기기념관: 악군(鄂軍•후베이군) 도독부(都督府)[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제공]

신해혁명 우창봉기기념관은 각종 인물조각을 통해 파란만장했던 우창봉기의 역사를 재현했다. [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제공]


한커우, 우한 근대화의 중심지
창장을 사이에 두고 우창과 마주보고 있는 한커우는 이미 우한의 최대 상업 중심지로 거듭났다. 예로부터 땅이 평탄하고 하류가 종횡으로 흘러 수상교통이 발달하고 항구로서의 기능이 우수했던 까닭에,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저장(浙江), 장쑤(江蘇), 광둥 등 주변 지역의 각종 상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상업활동과 무역을 전개했다. 부두로 통하는 길이 생기고 도시가 발달하자 한커우 지역에는 점점 우한만의 독특한 ‘항구 문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는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1861년 청나라 정부가 서구 침략자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한커우에는 강제로 외부와의 통상항구로서 해관(海關)이 설치된다. 이것이 바로 1861년 1월 생겨난 한커우의 해관인 ‘장한관(江漢關)’이다. 통계에 따르면 1865년부터 1937년까지 장한관에서 거둬들인 세수는 ‘톈진을 능가하며 상하이를 바짝 뒤쫓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내륙 항구로서 연해 통상항구에 필적할 만한 기능을 지닌 항구였다.
1922년 11월 장한관은 설치 60주년을 맞아 한커우 톈진루(天津路) 일대 강변에서 지금의 옌장다다오(沿江大道) 장한루(江漢路) 입구로 이전했다. 1924년 1월 장한관 신관 건물이 공식 완공됐다. 영국 고전주의 풍격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종탑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 45.85m, 종탑 끝까지 포함하면 83.8m에 달해 우한의 세 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꼽힌다. 장한관 종탑의 종소리는 영국 황실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정시마다 울리는 차임처럼 대를 이어 우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는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근 100 년에 걸쳐 세월의 더께가 쌓인 장한관은 여전히 창장 강변에 우뚝 서 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과거 서양의 조계지였던 이 곳이 이제는 우한의 금융 중심지이자 핵심 상업지역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장한관은 과거 중국의 반식민·반봉건 시절 치욕의 역사를 목격한 산 증인이자, 중국이 쇄국의 길에서 개방과 포용의 시대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준 소중한 교량이기도 하다.
2012년 11월 우한 해관은 57년 간 업무를 수행해 온 장한관을 떠났다. 그 뒤 3년 간 리모델링을 거쳐 박물관으로 변신, 2015년 12월 28일 대중에 개방됐다.
장한관 박물관에 들어서면 한때 분주했던 해관업무를 복원한 정경을 볼 수 있다. ‘강한조종(江漢朝宗·민심은 대세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뜻): 우한의 현대화 발자취를 좇아’라는 이름의 테마전은 다양한 문화재와 사진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우한의 근대 무역이 이뤄지던 시절을 소개하고 한커우 조계지의 과거 모습과 일반인들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역사적이면서도 새롭게 태어나는 우한의 도시적 흐름을 찬찬히 짚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만난 75세의 왕(王) 씨 할아버지는 자신이 강변에 살았기 때문에 늘 장한관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기자에게 “장한관은 근대 이후 우한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산 증인이자 압축적 상징물로, 후대에 남겨진 귀한 유산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옛 우한의 역사를 몸소 느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해관 업무를 보던 당시의 분주한 모습을 복원한 장한관박물관의 전시물 [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제공]

장한관 건물 전경[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제공]

러간몐, 산셴떠우피(三鲜豆皮), 야보(鴨脖, 오리목), 몐양싼정(沔陽三蒸) 등 우한의 다양한 음식이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인다.[사진=사도다마코(佐渡多眞子) 제공]


특색있는 먹거리가 가득한 ‘후부샹’
우한 사람들은 아침을 먹는다는 말을 ‘아침을 지낸다(過早)’고 표현한다. 중국인들은 웬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지낸다(過)’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새해를 지내다(過年)’, ‘명절을 지내다(過節)’ 등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베이징, 상하이, 선전(深圳) 등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아침 한 끼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아침은 그냥 거를 때도 많다. 하지만 우한에서 아침 식사는 새해를 지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한에서 ‘아침을 지내는 것’은 거의 제대로 된 정찬(正餐)을 먹는 것에 준할 만큼 중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한의 아침식사 종류는 중국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우한 사람들 스스로 “아침만으로 우한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곳은 광저우(廣州) 정도는 돼야 쳐줄까 말까”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할 정도이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고유의 맛을 가장 잘 담은 음식은 종종 깊은 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조우하게 될 때가 많다. 우한에서 먹거리를 파는 상점이 늘어선 골목인 후부샹(戶部巷)은 ‘우한의 맛을 담은 최고의 먹자골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후부샹은 우창에서 가장 번화한 쓰먼커우(司門口)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10 리에 달하는 거리가 이어져 있고(현 제팡루·解放路), 서쪽으로는 창장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학루가 버티고 있다. 쓰먼커우는 명·청 시대에 행정을 담당하는 포정사사(布政使司) 아문(衙門, 아문은 ‘관청’이라는 뜻)의 우창 사무처였다. 화폐와 식량, 호적을 담당했던 포정사(布政司)는 민간에선 ‘호부(户部)’라 불렸다. 후부샹 동쪽의 번고(藩庫)는 화폐와 식량을 보관하는 금고(金庫)와 량고(糧庫)로 나뉘었는데, 서쪽은 우창부(武昌府)의 량고가 있는 곳이다. 후부샹은 바로 이 두 곳간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이 생기게 됐했다.
항구와도 가까운 후부샹은 언제나 사람과 차량과 선박이 오가는 분주한 거리다. 후부샹의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고 부지런했다. 그들은 각종 신선한 재료로 맛있는 음식을 빠르게 만들어 내오기 때문에,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점차 그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0~90년대에는 길이 150m 폭 3m에 불과한 이 좁은 거리를 매일 수백 수천 명이 방문하여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뤘다.
2002년 들어 우창구가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돌입하면서 후부샹 역시 옛 모습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해 동안 진행된 리모델링 끝에 후부샹은 좁고 붐비던 작은 거리에서 후부샹 라오샹(老巷·옛 거리), 쯔여우루(自由路), 민주루(民主路) 서쪽단으로 이뤄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에는 각종 먹거리와 휴양·오락거리가 통합된 우한만의 독특한 관광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우한의 대표적 면요리 ‘러간몐(熱幹面)’으로 유명한 프랜차이즈 차이린지(蔡林記)를 비롯해 라오퉁청(老通城)의 떠우피(豆皮), 쓰지메이(四季美)의 탕빠오(湯包), 순샹쥐(順香居)의 꽃만두 샤오메이(燒梅, 또는 샤오마이<燒麥>), 셰자(謝家)의 튀김음식 몐워(面窩) 등은 우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맛집’이면서 우한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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