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준 논설주간]
지난 24~26일 사흘간 워싱턴에서 벌어진 세기의 외교 쇼가 끝났다. 주인공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80)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73), 조연은 모델 출신의 금발 멜라니아(56)와 국민 가수 출신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펑리위안(彭麗媛 · 63). 미 대통령으로서 처음은 아니지만 트럼프는 앤드루스 공항 트랩까지 직접 나가 영접했고, 하늘에는 B2 폭격기와 F-22 랩터 전투기가 비행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번 정상회담은 공동 기자회견 없이, 공동성명 하나 발표되지 않고 끝났다. 무대 장치는 좋았으나, 회담 내용은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워싱턴 시각 24일 오전 백악관에서 진행된 트럼프와 시진핑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됐다”고 중국관영 신화(新華)통신이 보도했다. 중국의 외교활동과 관영 신화통신의 보도를 삼십여 년 동안 관찰해온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이런 경우 신화통신의 보도는 중국 외교부의 조율과 확인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신화통신은 “양국 원수는 이 회담에서 중동 정세와 우크라이나 위기, 조선 반도 등 중대 국제 문제와 지역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전했다. 백악관 사건 시트(Fact Sheet)나 미국 미디어들은 트럼프와 시진핑이 한반도(Korean peninsula)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미 행정부는 미 대통령이 외국 국가원수와 논의한 내용을 비밀 보존 연한 30년으로 분류해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에 보관한다. 1971~1972년 진행된 제37대 리처드 닉슨(Nixon) 대통령,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Kissinger)와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에 진행된 비공개 회담 내용은 ‘Top Secret(1급 비밀)’로 분류되어 30년간 보존됐다.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을 상대로 추진한 미·중 ‘Rapprochement(래프로슈망 · 화해) 회담 내용은 30년 뒤인 2001년 4월에 비밀 해제됐다. 이 문서를 필자는 2002년 11월 미국 국무부 IVP(International Visitor Program)로 초청돼 조지 워싱턴 대학을 방문했다가 이 대학이 운영하는 National Security Archive 활동 민간 감시기구 관계자로부터 복사본을 넘겨받았다. “한반도 관련 대화 내용이 많다”는 말과 함께.
“남조선에는 당신들의 군대가 있으며 당신은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남조선에 있는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 우리는 1958년에 조선 반도에서 군대를 자발적으로 철수시켰다. 당신들은 ‘중국 군대가 압록강 바로 너머에 있으며, 언제든지 쉽게 되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압록강을 쉽게 넘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정간섭이 된다. …”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발전한다면 닉슨 대통령의 다음 임기 말쯤, 전부는 아니더라도 미국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임기가 아니고, 다음 임기에?”
“우리는 이미 2만명의 미군을 감축했다.”
“그래도 아직 4만명 이상이 주둔하고 있다. …”
주한미군 숫자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 6만3000여 명을 유지하다가,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사이의 1차 회담 4개월 전인 1971년 3월에 미 제7사단 철수로 2만명이 줄어 4만3000여 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7사단과 2사단을 모두 철수시키려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일방적 감축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위반’이라고 반발해서 실행되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카터 대통령은 1977~1979년 북한 전력 재평가와 국내외 반대로 1500명 철수에 그쳤고, 1980~1990년대에는 대체로 3만명대 후반을 유지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미 정부의 해외주둔군 재배치 전략(GPR)에 따라 9000명이 줄었고, 2008년 8월 이명박·부시 정상회담에서 2만8500명 수준 유지에 합의한 이후 이 숫자는 변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주한 미군 4만5000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71년 7월에 1차 회담을 한 키신저·저우언라이 비밀회담은, 10월에 두 번째 회담이 인민대회당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10월 22일 오후 4시 15분부터 8시 28분까지 4시간 13분 동안 한반도 문제가 주 의제였던 것으로 기록돼있다. 이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 지도부가 내부 토론을 거쳐 작성한 ‘8개 항의 요구’를 키신저에게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는 회담 전에 직접 평양으로 가서 키신저의 베이징 방문 사실을 김일성에게 알려주었고, ‘8개 항의 요구’는 7월 30일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 제1부총리를 통해 저우언라이에게 전달됐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작성된 ‘8개 항의 요구’는 ①주한미군 완전 철수, ②미국의 남조선에 대한 핵무기, 미사일, 무기 제공 중단. ③미국의 조선에 대한 정찰, 정탐 중단, ④한미일 합동 군사훈련 중지, 한미연합사 해체, ⑤주한미군의 일본군 대체 금지, ⑥유엔통일부흥 위원단(UNCURK) 해체, ⑦미국의 남북한 협상 방해 금지, ⑧유엔에서 한반도 문제 토의 때 북한 대표 참석 보장이었다.
1971년에 두 차례 진행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베이징 비밀회담은 그다음 해인 1972년 2월 21~28일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이어졌고, 사상 최초의 미·중 정상회담인 닉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회담은 1972년 2월 21일 오후 2시 40분 중난하이(中南海 · 중국공산당 지도부 집단 거주지) 마오 거주지 펑쩌위안(豊澤園)에서 진행됐다. 이 회담에서 마오는 “우리가 일본이든 남조선이든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닉슨은 이에 대해 “우리도 어떤 나라든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이 중국을 활용해서 소련을 대상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중국 전통 왕조들의 전략) 정책을 구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1979년 1월 1일로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976년 9월 마오가 죽자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해서 미국의 도움으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워싱턴 시각으로 지난 9월 24일 백악관에서 개최된 만찬 연설에서 시진핑은 1971년 시작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주석 사이의 화해 회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50여 년 전 중국과 미국 양국은 오래 방치돼있던 두 나라 교류의 대문을 핑퐁외교로 열었으며, 중국과 미국의 선배 정치가들은 ‘조그만 공으로 커다란 지구를 움직이는 정치 지혜를 발휘해서 중·미 관계 정상화라는 위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시진핑은 그러면서 “오늘 중·미 관계는 새로운 역사적 출발점에 섰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고 하고,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1971~1972년 세 차례에 걸친 닉슨·키신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사이의 미·중 화해 회담으로 양국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미국과 소련이 대치한 냉전(Cold War) 시대에 한반도에서 열전(熱戰)을 벌였던 미국과 중국은 20년 만에 진행된 1971년 양국 화해 회담 이후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관계로 전환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미국과 중국의 이익이 공존하는 지역”이라는 개념에 서로 합의했다. 회담 과정에서 중국은 사전에 평양으로 저우언라이를 보내 회담 개최 사실을 설명하고 북한의 미국에 대한 요구를 담은 이른바 ’8개 항의 요구‘를 전달받아 회담 과정에서 키신저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1971년 7월과 10월의 두 차례 비밀회담 과정에서 미국은 우리에게는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국은 1972년 2월 28일 미·중 간의 합의 내용을 담은 상하이(上海) 공동성명이 발표된 사흘 뒤에야 마셜 그린 국무성 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로 보내 박정희 대통령에게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조선일보 1972년 3월 3일자 1면 기사에 따르면 “그린 차관보는 박 대통령에게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 한반도에 대한 어떤 비밀흥정도 없었으며, 미국은 한국을 계속 강력하게 지지할 것’이라는 정책을 통보했다”고 당시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미·중 화해로 인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불안감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1월 10일 당시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담당 오원철 차관보를 청와대 경제 제2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해서 핵무기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게 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결정은 미 CIA가 1978년에 작성하고 2005년에 비밀 해제된 ‘South Korea : Nuclear Development and Strategic Decision making(한국의 핵 개발과 전략적 결정)’이라는 보고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번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서 어떤 수준까지 ‘조선 반도’ 문제를 논의했는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회담시간이 길지 않아서 깊은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트럼프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시진핑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미 행정부의 대통령 통치사료 비밀 보존연한인 30년이 지난 2056년에 가야 확인이 될 것이다. 물론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달라진 외교 행태는 그 이전에 표현되기는 할 것이다. 이번에 트럼프와 시진핑은 과연 한반도에 대해 무슨 말들을 주고받았을까.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주간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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