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희 칼럼] 보이는 물량으로는 이길 수 없다

  • 투명성, 실존산업과 실존국가를 세우는 백년 혁신의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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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희 숙명여대 경영학부 객원교수 ]

중국 반도체 기업의 상장 소식 하나에 한국 증시가 흔들린다. 조선과 자동차, 배터리와 스마트폰이 차례로 선두를 내주었거나 내주고 있다. 이제는 첨단 메모리까지 흔들린다. 물량과 속도로 중국과 겨루는 전략은 실패가 예정된 전략이다. 

한국 산업이 맞은 위기는 산업의 위기가 아니라 정신과 철학의 위기다. 중국에 대응할 자원은 자본도 공장의 크기도 아니고 투명성이다. 시스템이 강요하는 외적 투명성과 산업 주체가 스스로 쟁취하는 내적 투명성을 운영 체제로 내재화하는 일이며, 좋은 벤치마킹의 대상은 북유럽과 발트해 국가들이다. 그들이 패전과 영토 상실의 바닥에서 일군 것을 우리는 백 년 혁신개혁을 할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투명성은 도덕이 아니라 산업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현대인이 맹신하는 투명성이 자본과 시스템이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한 디지털 파놉티콘이라고 경고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가 말한 것은 외적 투명성이며, 우리 산업에 지금 필요한 것은 외적 투명성과 함께 내적 투명성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그것은 군중 속 껍데기를 벗고 신 앞에, 진리 앞에 단독으로 서는 투명성이고, 칸트에게는 탐욕과 불신을 닦아낸 내면의 법정이다. 또 한나 아렌트에게는 인간의 일하는 형태 3가지, 즉, 노동,작업,행위 중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 반대편에 껍데기 산업이 있다. 엔론은 분식회계와 주가 부양에 자원을 쏟다 사라졌다. 한국 증시에서는 쪼개기 중복 상장 같은 사례가 발생해 소액주주에게 껍데기만 남기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이전 미국이 발명하고 중국은 상용화하는 공장 모델을 졸업했다. 중국은 이제 원천과 양산을 아우르며 세계 제조업의 33%를 차지하고 곧 45퍼센트를 장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한국에게 마지막 남은 첨단 메모리마저 급속히 추격중이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은 나라 (베스타스) 

인구가 한국의 10분의 1 남짓한 덴마크는 중국이 세계 풍력 기업 상위 10개 중 6개를 거느리는 물량 공세 속에서도 비중국 시장 1위를 지킨다. 출발점은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패전으로 영토의 3분의 1과 인구의 40퍼센트를 잃은 절망이었다. 나라를 건져 올린 것은 팽창의 시선을 밖이 아닌 내면으로 돌린 자기 발견의 철학이었다. 시인 홀스트의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를 엔리코 달가스는 유틀란트의 모래땅 개간으로 옮겼고, 그룬트비히는 시험과 학위를 배제한 민중학교로 정신의 토양을 개간했다. 계급의 가면이 필요 없는 그 공간에서 나눈 살아 있는 말은 감시와 통제 비용이 제로에 수렴하는 신뢰 자본이 되었다. 

그 토양이 산업으로 꽃핀 장면이 트빈드 풍력 프로젝트다. 정부와 대자본이 원자력만이 대안이라며 압박할 때, 트빈드 대안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삽으로 기초를 파고 24미터 날개를 손으로 깎아 1978년 2메가와트급 발전기를 완성했고, 그 자율인들은 설계도와 노하우를 책자로 만들어 전 세계에 무료 배포했다. 특허로 묶는 대신 지식을 조건 없이 내어주는 이타적 투명성이었다. 그 도면 위에서 열아홉 살 헨릭 스티스달이 발전기를 독학으로 조립했고, 작은 철공소였던 베스타스가 그 기술을 알아보고 1979년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 세계 1위 풍력 기업으로 성장했다.

정직하지 않은 돈은 한 푼도 벌지 말라 (필립스 · ASML) 

1891년 게라드 필립스 형제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의 낡은 공장에서 전구 사업을 시작할 때, 창업 자금을 댄 아버지 프레데릭 필립스는 "정직하지 않은 돈은 한 푼도 벌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결함을 은폐해 고객을 속이지 않고 파트너의 지식재산권을 편취하지 않으며 재무제표를 투명하게 관리한다는 이 원칙이 한 세기가 지나 자회사 ASML의 DNA로 고착되었다. 

정직성의 철학은 1914년 물리학자 질 홀스트가 세운 필립스 물리연구소에서 꽃피웠다. 관료주의를 배제하고 자율성을 보장한 이곳에서 구성원은 실패를 은폐하지 않고 데이터와 가설을 가감 없이 공유했으니 심리적 안전감의 원형이 여기 있다. 1984년 필립스의 한 부서에서 독립한 ASML은 47명의 엔지니어가 낡은 천막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최고기술책임자 마틴 반 덴 브링크는 회의 중 젊은 엔지니어에게 물리 법칙을 근거로 정면 반박을 당한 뒤 "네 말이 맞다. 내가 틀렸고 네가 옳다"고 고백했고, 삼각검증을 방법론으로 정착시켜 나쁜 소식이 대화의 시작이 되게 했다. 기름때 묻은 작업대를 본 그는 "더러운 기계는 거짓말을 한다"며 바닥 청소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위험을 숨기지 않고 나누는 방식 (ASML · 칼 자이스) 

투명성의 진가는 위기에서 드러난다. 1980년대 후반 반도체 불황으로 모기업 필립스가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 매출 없이 연구개발비만 쓰던 ASML은 청산 1순위였다. 이사회 일원이었던 헹크 보트는 서류상 재무제표가 아니라 장부 이면의 현장을 읽었다. 이 사회를 끈질기게 설득해 이 투자가 실패하면 유럽 장비 생태계 전체가 붕괴해 기술 주권을 빼앗긴다는 논리로 3,000만 길더의 구제 금융을 관철시켰다. 1990년 본사 공장이 전소했을 때도 경영진은 언론을 통제하는 대신 타버린 공장 사진과 복구 로드맵을 전 세계 고객사에 공개했고, 단 한 건의 주문 취소도 없었다. 

2012년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개발에서는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인텔과 TSMC와 삼성전자를 찾아가 자사의 한계와 자금 고갈을 고백하며 지분을 줄 테니 개발비를 함께 대자고 제안했다. 세 회사는 23퍼센트를 38억 5,000만 유로에 사들이고 5년간 13억 8,000만 유로를 지원했다. 경영권은 지키면서 경쟁자까지 자기 로드맵에 태운 것이다.

공급망 원칙도 여기서 나온다. 최신형 장비 한 대에 10만 개가 넘는 정밀 부품이 들어가지만 ASML이 직접 만드는 비율은 15퍼센트뿐이다. 핵심 광학계를 공급하는 독일 칼 자이스와는 1983년 이후 강제적 계약서 없이 서로의 과학적 진정성에 대한 경외와 악수만으로 수십 년을 유지했고, 광학 오류가 났을 때 자이스가 원인은 자기 내부의 렌즈 연마 공정에 있었다고 스스로 시인했다. 2016년 자이스의 경영 리스크가 높아지자 ASML은 단가를 깎는 대신 현금 10억 유로로 지분 24.9퍼센트를 사들이고 7억 6,000만 유로를 무상 지원했고, 그 결과가 지구 크기로 늘렸을 때 산과 계곡의 차이가 0.1밀리미터에 불과한 초정밀 거울이다. 중국도 넘지 못하는 노광장비의 씨앗은 1891년 필립스 창업자 형제의 아버지가 남긴 절대정직과 절대투명성이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회사 (TSMC)

첨단 파운드리 시장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TSMC도 같은 원리 위에 있다. 모리스 창은 하버드에서 진리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의 가치를 익혔고, MIT와 스탠퍼드에서 물리 법칙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25년간 통계적 공정제어에 기반한 과학 경영을 체득했다. 1987년 회사를 세우면서 뒷돈과 인맥 수주와 가족 채용이라는 아시아 기업의 불투명성을 원천 차단했고, 초기 최대 투자자였던 필립스가 요구한 국제 회계 기준과 이사회 지배구조는 지역 인사의 청탁을 막는 방패가 되었다.

정직은 이 회사에서 도덕을 넘어 비즈니스의 알고리즘이다. 가장 분명한 시험은 2009년 40나노 공정 위기였다. 공정 결함으로 핵심 고객사인 엔비디아가 손실을 입었는데 기존 경영진은 보상을 거부하고 있었다. 은퇴했던 모리스 창이 복귀해 기술적 과실을 투명하게 인정하고,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우리의 잘못이 맞다며 사과하고 1억 달러 이상의 피해보상을 제시해 이틀 만에 합의를 끝냈다. 

2000년대 초 미세 공정이 193나노미터 벽에 부딪혔을 때 니콘과 캐논은 파장을 줄이는 건식 기술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렌즈와 웨이퍼 사이에 물을 채우자는 액침 노광을 TSMC 연구진이 제안하자 인텔과 일본 기업은 비과학적이라며 배척했고, 후발주자였던 ASML만이 그 데이터에 주목했다. TSMC는 실시간 제조 데이터와 결함 정보를 숨김없이 공개했고, 두 회사는 기밀의 장벽을 허문 팀이 되어 하이엔드 시장에서 일본 기업을 밀어냈다.

10나노와 7나노를 선점한 나이팅게일 계획의 핵심도 노동 시간이 아니라 데이터 신뢰였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개방형 혁신 플랫폼(OIP)과 칩렛 표준으로 중립국 역할을 수행하기에 파트너는 기술 유출의 두려움 없이 핵심 자산을 결합한다. 삼성도 늦게나마 비슷한 플랫폼을 구축했지만 스마트폰 등 완성재의 경쟁사인 삼성에 고객들이 설계기밀을 넘기기는 어려워 고객확대의 한계로 작용한다.

유럽의 규범도 이 회사에게는 경쟁자를 도태시키는 산업 권력으로 전환되었다. 반도체 업계 최초로 재생에너지 100퍼센트 사용에 가입해 해상풍력 전력 전량을 20년간 고정 가격에 구매함으로써 덴마크 오스테드 프로젝트의 재무 리스크를 없앴다. 한국 제조업에 던져지는 질문은 하나다. 상명하복의 위계와 원하청의 갑을 문화, 나쁜 소식을 중간에서 덮는 폐쇄성은 지속 가능한 투명성의 가장 치명적인 독약이다.

가장 약한 순간에 가장 강한 자본 (엔비디아 )

1996년 파산 직전의 엔비디아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첫 제품의 아키텍처가 시장 표준으로 떠오르던 고객사, 마이크로소프트의 다이렉트X와 어긋난다는 사실을 개발 도중에 알았고 회사 자금은 바닥나 있었다. 젠슨 황은 계약자인 일본 세가의 대표를 찾아가 자기들 아키텍처가 틀렸다고 고백하며 계약 해지를 요청했고, 그러면서 개발 계약금 500만 달러는 투자금으로 유지해 달라고 덧붙였다. 세가는 그 솔직함에 응했고 그 돈으로 새 칩이 나와 성공했다. 결함을 투명하게 인정하는 것이 궁극의 생존 전략이며 투명함이 가장 강력한 자본이라는 유산이 그때 새겨졌다. 

이 원칙은 개인의 미덕에 머물지 않고 엔비디아의 경영 구조가 되었다. 목표를 경쟁사가 아니라 물리학적으로 가능한 최단 시간에 두는 원칙, 중간 관리자를 줄여 60여 명의 임원이 대표를 직접 상대하는 구조, 밀실 단독 보고를 금지하고 모든 논의를 공개 자리에서 하는 관행, 실수를 징계 대신 공개 발표와 피드백으로 바꾸는 방식이 그렇다. 몇 년마다 회사를 옮기는 것이 당연한 업계에서 핵심 아키텍트들이 20년 넘게 근속하는 이유는 보상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기술 전환도 같은 논리다. 게임 그래픽 처리에만 쓰이던 칩에 미래 시장을 예견해 전 세계 개발자가 참여하는 쿠다 플랫폼을 따로 만들었고, 월스트리트는 이 소프트웨어를 낭비로 간주 아무 데도 닿지 않는 다리라 조롱했다. 급기야 시가총액은 12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2012년 제프리 힌튼 교수 팀이 활용한 이 회사의 두 장의 그래픽 카드(GPU)가 딥러닝의 문을 열었을 때, 엔비디아는 과거의 캐시카우를 버리고 인공지능 회사로 전환했다. 

탄소와 인권이 통행세가 된 시대 (유럽연합)

유럽은 군사력도 플랫폼 지배력도 아닌 4억 5천만 명 단일 시장의 접근권을 무기로, 전 세계 기업에 자신의 환경과 인권 규칙을 요구하는 브뤼셀 효과를 창출했다. 소위 유럽이 발휘하는 규범파워다. 지금의 질서는 제품의 전 주기에 내재된 탄소와 인권 이력을 투명한 디지털 데이터로 증명해야만 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 주권 장벽이다. 기후 리스크를 금액과 확률로 공시하게 강제하는 이중 중대성 원칙 아래, 보이지 않던 환경 리스크가 조달 금리와 주가를 결정하는 재무 변수로 격상되었다. 이중 중대성은 기업이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 환경이 기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모두 제무제표에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질적 비용 청구서는 이미 시행에 들어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유럽에 진입하는 탄소 다배출 품목은 내재된 탄소 배출량만큼 배출권 가격에 상응하는 인증서를 제출해야 하고, 대유럽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의 철강과 화학에 즉각적인 타격이 예고된다. 한국은 우리도 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특별 대우를 요구하지만 두 시장의 탄소 가격 격차 앞에서 통하지 않는다. 제품의 탄소이력을 기록하게 하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의 1차 시행은 배터리 대상 배터리여권이다. 원료 채굴부터 재활용까지 전 생애주기 정보를 디지털로 제출하도록 강제하고, 데이터가 하나라도 누락되거나 위변조가 의심되면 판매를 원천 봉쇄하는 예외 없는 이진법적 통제다. 

이 파도 앞에서 한중일의 대응은 갈린다. 일본은 경제산업성 주도의 민관 거버넌스로 국가 시스템을 유럽 표준에 동기화해 2025년 3월 세계 최초로 상호운용성 실증을 완료했다. 우라노스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중국은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어 데이터 입수가 원활한데다, 지리 자동차 자회사인 볼보는 영국의 탄소인증 소프트웨어 기업 서큘러와 협력 이미 배터리 여권을 장착시키고 있다. 더욱이 수소환원제철 설비를 조기 상용화해 탄소 배출량을 0에 가깝게 만들어 규제 자체를 형해화하고 있다. 한국은 국가 대표 플랫폼을 세울 골든타임을 놓쳤고, 자본과 IT 인프라가 없는 중소·중견 협력사는 데이터 블랙아웃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유럽은 규범을 설계할 역량은 있어도 상용화할 정밀 양산 인프라가 부족하다. 또 미국은 인건비로 제조 단가를 맞추기 어렵기 때문에 투명성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구축할 경우 한국에겐 오히려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불투명한 공정의 데이터를 서방이 신뢰할 무결한 데이터로 변환하는 정제 역량을 선점하는 순간 규범 종속국에서 규범 제정자로
가는 길이 열린다. 기후부,산업부,중기부 등 부처간 파편화된 업무내용을 단일화해 통상·ESG 컨트롤 타워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모래 위의 제국

중국은 세계 제조업 부가가치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태양광과 배터리와 전기차에서 CATL과 BYD가 글로벌 점유율 60~80퍼센트를 장악한다. 74개 핵심 기술 분야 중 66개에서 세계 1위 연구 성과를 기록했고 2025년 사상 최대 무역 흑자를 냈다. 미국은 같은 금액의 사상 최대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2025). 미국이 소송 만능주의의 변호사 나라로 기울었다면 중국은 국가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엔지니어의 나라다. 직선 도로에서는 앞선 차를 이길 수 없으니 굽은 길에서 추월한다는 발상으로 엔진에서 배터리로 밸류체인을 옮겨 세계 최대 전기차 제국이 되었다. 

중국의 불투명성으로 우선 지목되는 분야의 하나가 룰을 우회하는 보조금이다. 직접 보조금만 국내총생산의 1.73퍼센트, 세제와 토지와 신용 특혜를 합치면 4.4퍼센트에 이른다는 분석이 있다. 문제는 이 생태계가 극도로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사모펀드 외피를 쓴 정부유도기금이 수천 개 난립하고, 3차에 조성된 1,0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기금은 서방이 통제하는 첨단 노광장비와 설계 소프트웨어라는 초크포인트 극복에 집중된다. 국가 재정이 실패를 무한대로 흡수하는 구조하에서 기업은 사실상 마이너스 한계비용으로 생산하며 글로벌 가격 메커니즘을 붕괴시킨다. 

축적된 불투명성은 글로벌 무대에 드러났다. 당 위원회가 국유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을 감춘 채 상업적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 주체라는 주장으로 WTO 보조금 제재를 우회했다. 글로벌 공급망의 독점적 지위는 정치적 심기를 건드리는 국가를 응징하는 강압 무기로 전용되었다. 그러나 성공의 조건 자체가 결함이다. 

애플이 수사기관의 백도어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독립된 사법부와 시장의 투명성 없이, 국가 권력이 기업가를 하루아침에 공중분해시킬 수 있다. 이런 불투명성은 인류 보편의 혁신 기업이 나오는데 한계로 작용한다. 감시 카메라와 반간첩법이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닫힌 체제에서는 모방은 극대화될지언정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혁신은 자생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이 물량 공세나 통제 방식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향후 100년의 진로를 구상함에 있어서, 최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뒤집히는 구조를 끝내는 제도적 투명성, 우리 기술 없이는 중국의 인공지능 생태계도 미국의 빅테크 인프라도 구동될 수 없는 물리적 초크포인트를 쥐는 기술적 대체 불가능성, 고도화된 제조업과 절대적 투명성을 융합한 신뢰 파트너로 자리하는 전략적 투명성이다.

미국이 더 이상 미국답지 않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기술과 규범과 제도를 아우르며 국제 질서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자신이 설계한 규칙 기반 질서를 스스로 흔들고 있다. 일방적이고 불투명한 정책이 잇따르고 한때 세계가 신뢰했던 예측 가능성이 사라졌다. 패권은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대국이 약속의 지속성을 믿을 수 있어야 규칙과 동맹도 힘을 갖는다. 

기술 지표의 이동은 분명하다. 최상위 논문 산출과 인용을 계량하는 평가에서 중국 거점 대학이 최상위권의 상당수를 차지했고 기초과학의 총량 경쟁에서는 역전이 허용되었다. 라이덴 평가, 네이처 인덱스 지수가 그것이다.다만 이를 미국 혁신 역량의 붕괴로 단정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양자 컴퓨팅처럼 고도의 원천 지식과 다수 동맹국 연대가 요구되는 분야에서는 미국 주도 서방이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다. 

구조적 차이는 인재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다. 미국은 가장 우수한 인재가 법률과 금융과 컨설팅처럼 추상적 규칙을 다루는 허 경제 영역으로 모이는 사회로, 무에서 유의 창조에는 독보적이지만 제조 현장은 낮은 부가가치의 하청으로 취급되었고 설계도를 오차 없이 대량 생산하는 암묵지와 공정 노하우를 잃어가고 있다. 반대로 중국은 이공계 출신 테크노크라트가 지방 행정까지 포진해, 우선 만들어 보고 현장에서 고친다는 공정, 즉 실 경제 시스템을 우선한다.

불투명성은 대외 정책에서 더 선명하다. 기후 협약 탈퇴와 60여개 국제기구 지원 중단, 세계무역기구(WTO)의 최종 심판기구를 마비시킨 결정이 이어졌다. 아프리카 최빈국에 최대 50퍼센트의 보편관세를 부과해 공장 폐업을 초래하는 사이, 중국은 수교한 아프리카 53개국 전체에 수출품 100퍼센트 무관세를 시행했다. 

그럼에도 아직 미국의 우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배적 규칙과 이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와 모험자본의 흐름을 여전히 미국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 혼돈 속에서 한국의 전략은 어느 한 편에 서는 선택이 아니라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글로벌 가치사슬 중심에 자신을 묶어 두는 대체 불가능성, 첨단 안보 밸류체인과 범용 밸류체인을 구분해 관리하는 투 트랙 공급망, 중견국 다자주의가 그것이다.

신뢰 10퍼센트는 성장 1퍼센트다

후쿠야마는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불투명한 사회가 법적 검토와 계약 이행 감시와 뇌물이라는 막대한 거래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이 불신이 경제 활동에 부과되는 세금과 같다고 규정했다. 넥과 키퍼는 29개 시장경제 국가를 분석해, 사회적 신뢰도가 10퍼센트포인트 상승할 때마다 연평균 1인당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0.8~1퍼센트포인트 함께 올라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부패가 비즈니스 수행 비용을 평균 10퍼센트 이상 늘린다는 세계경제포럼의 추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에서 덴마크가 89점, 핀란드가 88점,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81점과 80점으로 최상위권을 지키는 동안 한국은 63점으로 31위다. 이 격차는 도덕적 자부심의 이유일 수 있지만 경제적 성적표의 차이로 나타난다. 1766년 스웨덴 의회는 공공 문서를 시민에게 공개하고 출판 사전 검열을 폐지하는 언론 자유법을 제정했고, 이 원칙은 세계 최초의 옴부즈맨 제도로 자랐다. 남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평등주의 규범, 즉 얀테의 법칙 문화는 사익 편취를 사회적 금기로 만들었고, 막대한 자원 국부를 국부펀드로 조성해 투자 포트폴리오를 공개하는 결정도 같은 원리다. 

기업의 내부도 같은 문법이다. 비만 치료제를 탄생시킨 노보 노디스크의 연구원은 금전적 보상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지식재산권을 투명하게 회사에 귀속시켰는데, 그 수익이 공익 재단을 통해 생명과학 연구로 환원되는 구조적 신뢰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동기는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제도가 만든다. 

위기 대응이 이 신뢰의 값을 보여준다. 핀란드 노키아가 몰락해 전 세계적으로 1만 8천 명이 거리로 나앉았을 때도 이 인적 자원을 방기하지 않았다. 기술 특허를 퇴직자가 헐값에 활용하도록 개방하고 창업자에게 최대 2년간 직전 급여 수준을 보전해 주는 실업 보험을 가동했다. 그 결과로 참여자의 60퍼센트 이상이 재취업에 성공하고 1,000개가 넘는 신생 스타트업이 탄생했다. 

영토를 대체한 나라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에스토니아는 디지털 플랫폼을 무기화해 사이버 안보 글로벌 표준의 룰세터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의 전면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의 은행 시스템과 물류망이 마비되었을 때, 지하 방공호로 대피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에스토니아 전자시민권 제도를 이용해 영업을 계속했다. 노트북과 스마트폰만으로 에스토니아 전자시민권 플랫폼에 접속해 유럽연합 법인을 설립하고 해외 결제 대금을 수령하며 동료의 임금을 지급했다. 우크라이나 전자정부 앱의 핵심 인프라는 이 나라의 분산형 데이터 교환 플랫폼 위에 세워졌다.

출발점은 절박함이었다. 독립 당시 재정은 파산 상태였다. 핀란드 정부가 아날로그 전화 교환기를 무상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 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인터넷으로 직행했다. 컴퓨터는 자본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과 동등해질 수 있는 이퀄라이저라는 판단이었다. 혁신을 가로막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부처 이기주의와 데이터 독점욕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법으로 부처이기주의를 붕괴시켰다. 국민에게 동일한 서류를 두 번 요구하는 정부 기관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불법이라는 원칙을 법으로 강제해 중앙 서버 없는 분산형 구조를 만들었다.

투명성은 위기에서 검증되었다. 러시아로 추정되는 대규모 분산서비스거부 공격(디도스)으로 국가 기능이 멈추자 평소 정부에 비판적이던 교수와 엔지니어와 화이트해커가 자발적으로 청사에 모여 방어했다. 그 연대는 민관 합동 사이버 예비군으로 제도화되었다. 185개국 출신 누적 14만 명이 전자시민이 되었고 이들이 세운 유럽연합 법인은 4만 개를 넘으며, 프로그램 하나가 한 해 국고에 1억 2,500만 유로를 안겨주었다. 이들은 납세자를 넘어, 위기 때 자국의 여론을 조성하는 외교적 우군으로 작동하는 국가 존립과 방어의 자산이다. 

오늘 발트 3국은 강대국에 순응하는 대신 전 세계가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독점적 원천 기술을 확보해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얻었다. 리투아니아의 레이저, 라트비아의 드론, 에스토니아의 디지털 행정 및 안보 플랫폼이 그것이다. 라트비아는 군사 드론과 전술 네트워크 기술의 허브로 부상했고, 리투아니아는 과학·산업용 레이저 원천 기술을 독점해 글로벌 반도체 장비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지위를 확립했다. 에스토니아는 잘 구축된 디지털 행정 시스템으로 100여개국을 지원 내지는 수출하고 있고, 유럽연합과 나토의 사이버 안보 사령부 혹은 허브로 입지를 구축했다. 작은 나라는 영토로 버티지 않고 대체 불가능한 초크포인트로 버틴다. 

재단이 지키는 백 년 (레고 · 오스테드 · 뱅앤올룹슨) 

덴마크의 투명성과 신뢰 자본은 단기적 제도의 산물이 아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함대를 잃고 국가 파산을 선언한 데 이어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독일에 패배하며 영토의 3분의 1과 인구의 40퍼센트를 상실했다. 공병 장교 출신 엔리코 달가스는 황무지나 다름없던 유틀란트의 모래땅 개간에 일생을 바쳤다. 

내면화된 투명성은 비즈니스 생태계로 전이되어 실존산업이라는 모델을 낳았다. 하향식 통제 경제에서는 기득권의 체면과 수직적 위계 때문에 전략적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매몰 비용 때문에 멈추지 못한다. 반면 투명성이 확보된 기업은 내부의 한계를 숨김없이 직시함으로써 언제든 기득권을 털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가벼운 몸을 지닌다. 위기에 몰린 뱅앤올룹슨은 과거 성공의 관성을 벗어던져 모바일 포터블 생태계를 개척했고, 국가 탄소 배출량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국영 화석연료 기업 오스테드(구 Dong에너지)는 화석연료 핵심사업의 붕괴 위험과 기후 변화를 연계한 데이터를 노조와 정치권과 국민 앞에 공개하고 기존 수익의 절대다수를 창출하던 석유와 가스 라이선스를 매각해 세계 1위 해상풍력 기업으로 변신했다.

이 모든 것을 백 년 넘게 떠받치는 구조가 있다. 창업자 일가의 사익 편취나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으로부터 연구 철학을 보호하기 위해 공익 목적의 재단이 의결권 주식의 절대다수를 장악하는 지배구조다. 위기에 몰린 레고도 새 경영진이 조직 내부의 방만함을 공론화하고 부품 종류를 절반 가까이 줄였으며, 위기의 실체와 책임 소재를 투명하게 공유했기에 인력 감축의 고통 속에서도 소모적 갈등을 최소화했다.

재생에너지 영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사회적 갈등 비용을 지운다. 2025년 글로벌 풍력 시장에서 중국이 신규 설치 100기가와트를 넘어서며 글로벌 판도를 흔들었지만 베스타스는 비중국 시장 1위를 지켰다. 아래로부터의 산업이 아닌 위로부터의 풍력개발을 추진한 독일은 처음에 실패를 겪었다. 독일이 대기업을 동원해 개발한 3메가와트급 터빈 그로비안은 이론적 우월성만 믿고 현장의 시행착오를 무시한 결과 420시간 가동 후 고철이 되었다.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증거

대한민국은 억압적 성장 체제를 벗어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쟁취한 국가다. 미세 공정의 물리적 한계 앞에서 D램의 시대는 끝났다는 비관론이 학계를 지배하던 시기, 한 연구자는 수익도 관심도 없는 실리콘 관통 전극과 3차원 패키징 연구에 천착하며 고온에서 패키지가 휘는 현상 같은 실패를 학생들과 15년 넘게 축적했다. 

카이스트 김정호 교수의 이야기다. 그 연구가 SK하이닉스를 고대역폭 메모리의 나라로 만들었다. 전 세계 로봇 공학계가 이족 보행 휴머노이드에 예산을 쏟을 때, 자연이 수백만 년에 걸쳐 최적화한 동물의움직임에서 답을 찾은 연구자가 있다. 시각 센서 없이 발끝의 촉각만으로 1초에 20번 지형을 판단하며 걷고 뛰는 로봇은 센서가 파괴되거나 암흑 속에서도 임무를 수행한다.

MIT 김상배 박사 이야기다. 초전도 방식을 고집하는 거대 기업들과 달리 상온에서도 안정적인 이온 트랩 방식을 창안하고 세계 최초로 뉴욕 증시에 상장한 기업도 같은 계보다. 아이온큐 김정상 대표 이야기다. 수소 저장과 활용에 있어서 혁신적인 암모니아 크래킹 기술로 글로벌 투자를 유치하고 한국 기업과도 협력중인 재미 스타트업 아모지 우성훈 대표도 여기에 속한다. 

주목할 사례는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항암제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허가를 받은 유한양행이다. 연구진이 3년이 넘는 임상 3상 동안 1,5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감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배구조에 있다. 최대 주주가 공익 목적의 재단이어서 오너 일가의 사익 편취나 단기 배당을 요구하는 헤지펀드의 압박이 차단되었고, 그 덕분에 최근 10년간 1조 7,000억 원의 연구개발 예산을 투입하는 인내가 가능했다. 신약 수익이 재단의 배당금으로 유입되어 장학과 복지로 환원되는 선순환은 덴마크식 실존산업 모델의 한국적 완성형이다.

역사도 한국의 투명성 잠재력을 보여준다. 남수단 톤즈에서 한센병 환자의 상처를 맨손으로 어루만진 이태석 신부의 진정성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았고, 1597년 명량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13척으로 330여 척의 왜선과 맞서며 구원병도 기적도 약속하지 않고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며 절대적 죽음이라는 현실을 구성원 모두에게 고백하고 공유해 승리로 이끌었다. 백성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게 한 세종의 훈민정음도 같은 계보의 유산이다. 

백 년 혁신의 첫 삽

중국의 5개년 계획이나 수직적 자본주의는 물량 투입으로 단기적 성장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전환하는 회복탄력성이나 구성원의 진정성을 끌어내는 철학적 기반은 부족하다. 자원도 영토도 인구도 부족했던 나라들이 보이지 않는 자원 하나로 국력의 열세를 뒤집었다는 사실이 남긴 교훈이다.

투명성은 제도를 뜯어고친다고 하루아침에 내재화되는 기술적 장치가 아니며, 부패를 막기 위한 엄벌주의나 정교한 정보기술 감시망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본질적으로 정신과 철학의 문제다. 두 축은 분명하다. 하나는 유럽을 위시한 글로벌 경제가 요구하는 탄소와 인권을 증빙하는 외적 투명성이며, 이는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통행세다. 다른 하나는 정직하지 않은 돈은 한 푼도 벌지 말라는 1891년의 필립스 모토를 우리 기업의 문화와 구성원의 양심에 내재화하는 내적 투명성이며, 이는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다. 중국이 넘지 못한 난공불락의 노광장비가 절대정직과 절대투명성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이 근원적으로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한국 산업은 마지막 남은 경쟁 우위마저 흔들리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서 있다. 각자도생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밀실에 숨어드는 낡은 관성을 끊어내고, 실패를 징벌하지 않고 자산으로 공유하는 심리적 안전망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전략이다. 장기적으로 사회적 거래 비용을 낮추고 구성원의 자발적 몰입을 극대화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적 무기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물량으로는 중국을 이길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성의 힘으로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 투명성은 한국 산업이 앞으로 100년을 실존적으로 버텨낼 가장 굳건한 반석이다. 실존산업과 실존국가를 세우는 백 년 혁신의 첫 삽은 ASML의 회의실에서 처럼 자신의 잘못을 바로 인정하는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독일어과 △KOTRA 뮌헨 및 함부르크 무역관장, 글로벌연수원장 △ 한국산업인력공단 국제인력본부장 △국립순천대 무역학과 초빙교수 △ 숙명여대 경영학부 객원교수 (2026년 현) 

(저서)

아름다운혁신, 폴스바겐을 타고 나는 날았다(역), 한국인과 문화간 커뮤니케이션(공저), 중국산업굴기의 비밀, 트랜스패런시
The Secret to China’s Industrial Rise (Ama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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