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질주가 거침없다. 삼성전자에 이어 국내 상장기업 중 두번째로 시가총액 2000조원을 돌파했다. 부동의 대장주인 삼성전자와의 격차도 크게 줄어들었다. 오는 7월 미국 ADR(주식예탁증서) 상장까지 추진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질 경우 시가총액 역전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시총 2000조원 돌파는 자본시장과 산업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시장의 자금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기업들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숫자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AI 혁명은 기존의 산업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가히 구조적 변화라 할 수 있다. 특히 AI 시대 반도체는 핵심 자산으로 떠올랐다. AI의 성능은 결국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고, 그 핵심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있다. SK하이닉스는 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며 글로벌 AI 공급망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반도체가 더 이상 특정 산업의 부품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안보를 좌우하는 전략자산이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 석유를 확보한 국가가 경제 패권을 장악했다면, 이제는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고 공급할 수 있는 국가가 미래를 주도하는 시대가 됐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도 결국 반도체를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2000조원'이란 숫자에 환호만 해선 안된다. 시가총액 2000조원 돌파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무엇보다 한국이 AI 시대 반도체 주도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은 결코 한 기업의 힘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 소재와 부품, 장비, 설계, 패키징,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업과 인력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 지금의 성공이 특정 기업에 집중된 성과로 머문다면 경쟁 우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인재 확보도 시급하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지원에 나서고 있다. 반도체 공학 교육 확대와 연구개발 투자 강화, 해외 우수 인력 유치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규제 혁신과 전력·용수 등 산업 인프라 확충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반도체 호황의 온기를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에 대한 고민도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천문학적 이익, 그 이익을 나누는 분배의 문제는 지금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초과세수를 어디에 쓸 지 등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대기업의 성장이 협력사와 중소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AI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일부 기업의 실적 개선에 그쳐서는 안 된다. 협력업체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이 새로운 사업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산업 생태계를 넓혀야 한다. 그래야 반도체 강국의 성과가 국가 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2000조 시대는 분명 한국 산업사에 남을 이정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숫자 자체에 있지 않다. AI 시대의 핵심 전략산업에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성과를 일회성 호황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다. 기업의 성공을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하고, 대기업의 성장을 산업 생태계 전체의 발전으로 확산시킬 때 비로소 한국은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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