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칼럼] AI와 함께 사는 시대…인류가 지적 성장을 멈추지 않으려면

임혜숙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임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오래전 대학을 다니던 중, 처음으로 오픈 북 시험을 치렀을 때의 일이다. 시험 범위가 워낙 방대하기도 했지만, 원하는 만큼 책과 자료를 보면서 시험을 치를 수 있어, 많은 책과 자료들을 뒤적이며 어떤 정보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러한 정보에 관한 표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표를 중심으로 자료를 찾아 읽고 이해하며 시험을 치르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예상과 다르게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이 경험은 학습 노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문제를 풀어보거나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지식을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클리(Oakley) 등이 저술한 ‘기억의 역설 (The Memory Paradox: Why Our Brains Need Knowledge in an Age of AI, 2025)’이란 논문에서는 생성형 AI의 시대에 인간의 기억은 역설에 직면해 있음을 말한다. AI나 디지털 도구와 같은 외부 보조 수단에 의지하여 뇌의 부담을 줄이는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의 증가로 우리는 지식을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게 되었고 기억체계가 덜 사용되어, 이에 따라 인간의 사고 능력 자체가 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는 ‘구글 효과 (Google effect)’ 혹은 ‘디지털 건망증 (digital amnesia)’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검색한 정보를 언제든 원할 때 다시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습관은 다른 형태로도 나타난다. 수업 시간에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수업내용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칠판이나 컴퓨터 스크린에 적힌 내용을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자 한다. 강의자료를 따라가며 손으로 적고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에 남아야 할 수업내용을 한 장의 사진으로 보관하며 학습 과정을 건너뛰려는 것이다. 손으로 쓰는 행위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고의 구조화를 돕는다는 것을 간과한 학생들의 이런 변화는 단순한 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학습 방식이 왜곡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쉽고 편리하게 정답을 제공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자주 사용할수록 학습의 주체성은 떨어진다. 현대인들은 인공지능이 대신 생각하게 만들고, 사고의 전 과정을 인공지능에 위임하는 ‘인지적 외주화(cognitive outsourcing)’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서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추론과 해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정보를 처리한다. 학습의 능동적인 노력이 생략되고, 여러 정보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여 사고하고 그 타당성을 따져 비판적으로 판단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때 학습자는 사고와 인식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새로운 정보를 자신의 기억체계에 통합시키지도 못한다.
 
글을 읽고, 이해하고, 통찰로 연결하여 글을 쓰는 복잡한 사고 과정을 AI가 대신해주는 일에 익숙해지면 버리기 힘든 습관이 된다. 전반적인 사고 흐름이 약화되는 것이다. 지금 읽은 글이 내가 가진 지식이나 내가 살아온 경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이 정보가 어떤 관점과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인지를 질문하고 따져 보는 과정, 이 내용 중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은 읽고 쓰기의 핵심이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생략하고, AI가 대신 작성한 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의 사유 능력은 퇴화할 수 밖에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실패를 통해 배우고 그 과정에서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경험의 축소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설을 세우고 예측하며, 실제 결과를 확인하여 그 가설이 옳은지를 검증한다. 실제 결과를 통해 가설이 옳다고 검증되면 인식이 강화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지식 혹은 인식을 수정한다. 이런 과정은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기존의 인식 및 경험과 대조하고 조정하며 정교화해나가는 과정이다. 예상과 다른 결과를 마주하고, 좌절을 겪으며, 다시 시도하는 경험은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서는 성장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즉각적인 정답’은 이러한 시행착오의 기회를 줄인다. 실패를 겪지 않는 학습은 빠르게 성과를 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즉 진정한 의미의 지적 성장을 가로막는다.
 
우리 사고 능력의 퇴화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의도적으로 인간의 지식체계를 이용하는 불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과거에 살던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자주 다니는 지하철 노선, 버스 노선과 길을 외워 웬만한 장소는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찾아다니고, 어려운 글을 읽으며 의미를 해석하고 기억하려 애쓰고,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문장을 외우고, 좋아하는 시를 외우는 일이다. 음악을 들으며 가사와 리듬을 기억하려 노력하고 곡명과 연주자를 외우는 일들이다.
 
쓰고자 하는 글의 구조와 흐름을 기획하고 자료를 찾고 이해하고 요약하고 인용하며,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생각해내고자 애쓰는 글쓰기의 어려운 과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일, AI가 번역한 문장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대신 그 안에 편향이나 오류가 없는지 의심하고 분석하고, 학술적으로 적절한 용어를 사용했는지, 표현 방식이 올바른지를 확인하는 일들이다. 어려운 주제에 도전해 가설을 세우고, 논리적 단계를 거쳐 모색한 다양한 해결 방법을 시도하고, 때론 실패하며 오류를 경험하고,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경험을 축적하는 일이다. 사고력의 핵심인 장기기억 속 지식과 경험이 끊임없이 활성화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류는 AI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 유용한 도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AI와 동반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사고력의 퇴화를 멈추고 지적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AI에 너무 의존하지 않으려는 자기 절제가 필요하고, 기술과 사고 능력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IEEE Fe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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