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BTS아리랑에서 K-헤리티지 글로벌로]④ 아리랑은 노래가 아니라 플랫폼이다

아리랑을 ‘노래’로만 이해하면 BTS의 선택은 상징적 이벤트로 끝난다. 그러나 아리랑을 ‘플랫폼’으로 읽는 순간, 이 선택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BTS가 호출한 것은 특정한 멜로디가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 축적돼 온 하나의 문화 구조였다.


아리랑에는 정본이 없다. 작곡가도 없고, 단일한 가사도 없다. 지역마다 달랐고 시대마다 변주됐다.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이 공존했고, 노동요와 이별가, 저항의 노래와 위로의 노래가 같은 이름 아래 겹쳐졌다. 이 유연성 덕분에 아리랑은 살아남았다. 고정되지 않았기에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픽지피티
[그래픽=지피티]


이 점에서 아리랑은 전통적인 ‘작품’이 아니라,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플랫폼에 가깝다. 기본 정서와 리듬만 공유할 뿐, 해석과 변주는 참여자에게 열려 있었다. 세대와 지역, 장르가 자유롭게 접속해 각자의 아리랑을 만들어왔다. 아리랑은 소비되고 끝나는 콘텐츠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생성되는 구조였다.


이 구조는 세계 문화사에서도 낯설지 않다. 미국의 블루스가 그렇다. 블루스 역시 특정 작곡가나 정본이 없다. 고통과 이동, 상실의 정서를 공유한 채 수천 곡으로 분화했고, 재즈와 록, 힙합으로 끊임없이 변주됐다. 블루스는 보호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사용됐기 때문에 확장됐다.


라틴아메리카의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도 마찬가지다. 멕시코의 이 의례는 특정 행사나 공연이 아니라, 참여 가능한 문화 플랫폼으로 작동해 왔다. 가족과 지역, 예술과 상업이 자유롭게 접속하며 변주를 거듭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Coco)가 세계적 공감을 얻은 이유도 전통을 설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플랫폼에 자연스럽게 접속했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같은 궤적에 있다. 일본 신화와 목욕탕 문화, 정령의 세계를 친절하게 번역하지 않았지만, 그 세계관은 플랫폼처럼 열려 있었다. 관객은 설명 없이도 그 안에 들어가 머물 수 있었다. 전통은 닫힌 설정이 아니라, 참여 가능한 세계로 제시될 때 힘을 갖는다.



BTS는 이 플랫폼의 속성을 정확히 읽었다. 그들은 아리랑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민요의 형식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대신 아리랑이 작동해온 방식, 즉 반복과 변주, 이별과 연대라는 감정의 구조를 현대의 음악 언어 위에 올렸다. 그 결과 아리랑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글로벌 플랫폼으로 다시 작동했다.


이 지점에서 K-헤리티지 논의의 방향도 분명해진다. 전통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만 관리하는 방식으로는 세계와 연결될 수 없다. 보호와 보존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플랫폼은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될 때 힘을 가진다. 아리랑이 살아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사용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의 전통 관리 체계가 이 플랫폼의 속성을 억눌러 왔다는 점이다. 정본을 만들고 원형을 규정하며, 변주를 예외나 오류로 다뤄왔다. 그 결과 전통은 안전해졌지만 멀어졌다. 존중받았지만 참여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문화가 아니라 설명해야 할 대상이 됐다.


BTS의 ‘아리랑’은 이 관리 방식에 대한 조용한 반박이다. 전통은 통제할수록 위축되고, 열어둘수록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플랫폼으로서의 전통은 참여를 전제로 한다. 참여가 반복을 낳고, 반복이 신뢰를 만든다. 신뢰가 쌓일 때 전통은 세계의 자산이 된다.


이 관점은 문화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K-헤리티지를 관광 상품이나 국가 홍보 콘텐츠로만 설계하는 순간, 플랫폼은 닫힌다. 체험 코스와 인증샷 중심의 소비는 일회성에 그친다. 반면 플랫폼으로 설계된 전통은 음악과 게임, 전시와 교육, 디지털 기술이 각자의 방식으로 접속하며 새로운 변주를 만든다.


아리랑의 수천 개 버전은 실패한 원형의 흔적이 아니다. 플랫폼이 정상적으로 작동해 왔다는 증거다. BTS는 이 플랫폼의 글로벌 트래픽을 폭발시킨 계기였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이 접속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지, 반복 가능한 구조로 이어질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아리랑은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감정을 처리하고 공동체를 이어온 하나의 플랫폼이다.
BTS는 그 플랫폼을 세계에 연결했다.


이제 남은 질문은 분명하다.
이 플랫폼을 어떻게 설계하고, 누가 참여하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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