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BTS)의 월드 투어 일정에서 중국 본토가 빠졌다는 소식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새로울 것도 없다. 익숙한 이유가 반복될 뿐이다. ‘한한령’. 문서도 없고 공식 명칭도 없지만, 작동 방식만큼은 분명한 그 비공식 규제다.
중국은 한한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한국 연예인과 콘텐츠가 중국 본토에서 사실상 봉쇄돼 왔다는 현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공연은 홍콩·마카오에 머물렀고, 중국 본토는 늘 ‘다음에’로 미뤄졌다. 최근 한중 관계가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되지만, 문화 영역만큼은 여전히 관료적 판단의 그물망에 걸려 있다.
이쯤에서 질문은 외교 전망이 아니라 구조를 향해야 한다.
이 선택으로 과연 누가 무엇을 잃는가.
표면적으로는 BTS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최대 인구 시장, 잠재적 관객 수천만 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계산은 오래된 착시에 가깝다. BTS는 특정 국가의 승인이나 시장 접근권으로 완성된 그룹이 아니다. 이들이 전해 온 메시지는 국경과 이념, 세대를 가로지른다. 청춘의 상처, 자기 존중, 연대라는 서사는 어느 한 나라의 검열 기준으로 재단될 수 없다.
더구나 지금은 SNS의 시대다. 공연장 하나를 닫는다고 문화 향유가 차단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스마트폰 화면은 국경을 묻지 않는다. 중국의 팬들 역시 여전히 음악을 듣고, 영상을 공유하며, 커뮤니티를 유지한다. 물리적 무대만 없을 뿐, 문화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경제학의 오래된 격언이 이 장면을 설명한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은 반드시 생긴다.” 통제는 사라짐을 만들지 못한다. 다만 우회를 만들 뿐이다.
역사는 이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냉전 시기 소련은 재즈와 록을 ‘퇴폐 문화’로 규정하며 차단했다. 결과는 역설이었다. 금지된 음악은 지하로 스며들었고, 오히려 더 강한 열망을 낳았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검열은 작품을 죽이지 못한다. 다만 검열자를 드러낼 뿐이다.” 문화는 숨을 참지 않는다. 길을 바꿀 뿐이다.
이제 시선은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돌아간다.
과연 손해를 보는 쪽은 BTS인가. 오히려 중국이 스스로를 글로벌 문화 교류의 장에서 한 발 물러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가 BTS를 통해 한국 문화의 진화된 형태—전통과 현대, 개인과 공동체, 상처와 연대—를 읽는 동안, 중국은 그 장면에 함께하지 못한다. 이는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경직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관료가 지배하는 국가가 반복해 온 익숙한 오류다.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문명은 외부의 도전에 응답하지 못할 때 쇠퇴한다.” 문화 개방은 위험이 아니라 학습의 통로다. 교류는 상대를 약화시키기보다 자신을 단련한다. 닫힌 문화는 안정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고립을 낳는다.
정치적 잣대로 예술을 재단하려는 발상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60~70년대 미국 남부에서 록과 소울은 ‘불온’의 낙인을 찍혔지만, 결국 미국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마크 트웨인의 격언이 정확하다. “금지된 책을 읽지 않는 나라에서는 결국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 금지는 순응을 만들지 못한다. 무관심을 남길 뿐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BTS는 손해 보지 않는다. 세계는 이미 열려 있고, 팬들은 국경을 우회하는 법을 알고 있다. 공연을 막는다고 문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문화가 자신을 비켜가도록 만들 뿐이다. 중국이 잃는 것은 콘서트 몇 회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화적 순간이다. 문화의 격언은 단순하다. “열면 스며들고, 닫으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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