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공허한 구호보다 구조 해법이 환율을 안정시킨다

최근 외환시장은 다시 한 번 환율이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구조적 신뢰에 의해 움직인다는 기본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 엔화와 원화가 동시에 급변하며 시장의 불안 심리가 증폭된 배경에는 글로벌 통화 흐름뿐 아니라 각국 정부의 구두 개입, 정책 신호의 혼선,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구조적 부담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환율은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축적된 조건의 결과다.

엔·달러 환율은 최근 일본과 미국 외환시장에서 단기간 급락했다.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동결 이후 우에다 가즈오 총재의 기자회견을 전후해 엔화는 한때 급락했으나, 이후 미·일 외환당국이 과도한 엔저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공조 신호가 시장에 퍼지며 빠르게 반등했다. 일본 재무성과 뉴욕 연준이 이른바 ‘레이트 체크(rate check)’에 나섰다는 관측만으로도 엔 매수세가 강화된 점은, 실제 개입 여부와 무관하게 정책 당국의 태도가 시장 심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이 엔화의 변동성은 고스란히 원화로 전이됐다. 원·달러 환율은 한때 1,480원을 넘어서며 급등한 뒤, 엔화 강세와 개입 경계 심리에 동조해 1,450원대 중반까지 내려왔다. 여기에 미국 재무당국의 발언과 대통령의 환율 전망 언급까지 겹치며 시장은 방향성을 잡지 못한 채 크게 흔들렸다. 구두 개입은 단기적으로 쏠린 심리를 되돌릴 수는 있어도, 환율의 중기 추세를 바꾸는 수단은 아니라는 점이 다시 확인됐다. 

문제는 이러한 변동성이 단순한 심리 요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외환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구조적 부담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 간 투자 관련 팩트시트에 대한 인식 차이는 외환시장에 명확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정부 문서에서는 총 3,500억 달러 투자 중 상당 부분이 장기 분할 투자이거나 대출·보증 등 금융지원 성격임을 강조한 반면, 미국 측 문서에서는 투자 승인 감독, 법적 구속력, 이익 배분 구조 등 보다 강한 실질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익 배분과 투자 통제권을 둘러싼 표현의 온도 차이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불확실성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실질실효환율이 보내는 신호는 더 분명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한국의 실질실효환율(REER)은 86.29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 교역 상대국의 물가와 환율을 함께 반영한 이 지표에서 한국은 일본과 함께 64개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장기간의 초저금리와 엔저 누적으로 실질환율이 크게 훼손된 일본과 나란히 꼴찌권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원화 약세가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성장률 둔화, 재정 부담 확대, 자본 유출 구조 등 기초 체력 약화가 누적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구두 개입이나 일회성 발언으로 환율 변동성을 제어하기 어렵다.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시장에 맡겨야 할 영역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외교·통상 협상 과정에서 불필요한 불확실성을 키우는 표현을 줄이고, 정책 신호를 일관되게 관리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외환시장 안정에 대한 원칙적 의지를 밝히고 과도한 쏠림을 경계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환율 수준이나 방향을 예단하는 발언은 시장을 설득하기보다 오히려 신뢰를 훼손할 위험이 크다. 

환율은 정치로 ‘해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정치로 풀 수 있는 것은 풀되, 그 이후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 구조적 부담을 줄이고, 정책의 일관성을 쌓으며, 팩트에 기반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환율 변동성을 낮추는 유일한 길이다. 외환시장은 말을 듣는 곳이 아니라 기록을 보는 곳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구조이며, 의지가 아니라 숫자다. 그것이 원화를 다시 평가받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국제결제은행BIS 2025년 12월 주요 나라별 실질실효환율 한국의 순위는 64개국 중 63위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BIS 웹사이트
국제결제은행(BIS) 2025년 12월 주요 나라별 실질실효환율 (REER) 한국의 순위는 64개국 중 63위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BIS 웹사이트)
하나은행 딜링룸 2025 123 연합
하나은행 딜링룸 2025. 1.23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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