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헌 필요성을 말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실제 개헌 논의는 정치적 셈법에 갇혀 공전하기 일쑤였다.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등장했지만 대부분 '국면 전환용 카드'로 전락한 것이 한국 현대사의 반복된 풍경이었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국정농단 사태로 국정이 마비되자 돌연 개헌을 꺼냈다. 대통령 탄핵이 가시화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집권 여당은 '탄핵 대신 개헌'을 주장하며 임기 단축형 개헌을 밀어붙였지만, 책임 회피를 위한 방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야권은 "탄핵이 먼저, 개헌은 그 다음"이라며 맞섰고, 결국 개헌 논의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본격적인 논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2017년 조기 대선에서 이뤄졌다. 문재인 후보를 비롯한 주요 대선 주자들은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등 다양한 구상을 제시했다. 국회 차원에서도 개헌특위가 가동됐지만 성과 없이 종료됐다. 당시 촛불 민심이 요구했던 직접 민주주의 확대, 검찰 견제, 지방분권 같은 의제는 깊이 다뤄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1987년 헌법 이후 처음으로 임기 내 개헌을 시도한 정권이었다. 2018년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대통령 발의 개헌안까지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에는 4년 중임제, 지방분권 강화, 기본권 확대 등이 담겼다. 하지만 야당은 '관제 개헌'이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불발됐다. '국민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내걸린 문재인 정부 개헌은 결국 정치적 대립 속에 묻혔다.
잠시 잠잠했던 개헌 논의는 2022년 대선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4년 중임제와 국회 추천 총리제를,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는 책임총리제와 결선투표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는 "국회 논의에 따르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유지하며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결국 대선 정국의 핵심 이슈가 집값, 코로나19, 양극화 등 민생 문제로 쏠리면서 개헌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역사상 유례없는 헌정 위기가 초래되면서 개헌의 시급성과 필요성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국민의힘과 윤 전 대통령이 불법 계엄 사태에 따른 책임론을 모면하기 위해 개헌 카드를 꺼내 들면서, 개헌 논의는 또다시 정치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꾸준히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권은 이번 지방선거를 개헌 국민투표와 동시에 치를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다. 대통령과 광역단체장의 임기를 일치시킬 수 있는 드문 시기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까지 10여년간 공전만 거듭한 개헌 논의가 이번에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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