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임명식' 이름 하나 바꾼 것이 왜 중요한가?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지난해 말, 비상계엄 이후,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인용하면서 윤 대통령은 파면되었다. 비상 상황 속에서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국민 다수는 민주적 회복과 정치 개혁을 내세운 이재명 후보를 선택했다. 그는 ‘국민이 임명한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언어적 정체성을 내세우며 ‘취임식’을 ‘임명식’이라 명명했고,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대통령 취임식을 ‘임명식’이라 칭한 언어 선택은 권력의 방향을 되돌리는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취임(就任)’이라는 말은 자리에 나아가 처음으로 임무를 본다는 의미이다. ‘임명(任命)’이란 일정한 지위나 임무를 남에게 맡긴다는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은 오랫동안 ‘군림하는’ 권력자로 인식되어 왔다. ‘취임’이라는 표현도 이러한 인식을 언어적으로 뒷받침한다. 취임은 마치 왕이 즉위하듯, 스스로 권력을 수용하고 행사하는 뉘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임명’은 그렇지 않다. 주체가 국민이며, 대통령은 그 위임을 받아 봉사하는 위치에 있다.
 
대통령 스스로가 국민에 의해 임명된 자라고 말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과 언어적 교감을 갖춘 사회라 할 수 있다. 언어가 바뀌면 사고가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언어는 곧 권력의 설계도이며, 그 위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그릴 수 있다.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도 못한다는 이 단순한 문장은 언어가 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언어상대주의’, 내지 ‘언어결정론’을 중심으로 하는 20세기 미국 언어학의 대표적인 이론 중의 하나인 ‘사피어-워프(Sapir-Whorf) 가설’과도 관련지을 수 있다.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에 따라 해석하고 이해한다. 즉,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취임’이라는 단어는 무의식적으로 대통령에게 권위를 부여하지만, ‘임명’은 그 권위를 다시 국민에게 돌려준다. 단어 하나의 선택이 인식과 권력 구조를 동시에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 언어는 그 무게가 매우 무겁다. 정치의 언어는 곧 권력의 언어이며, 이재명 대통령의 '임명식'은 국민이 권력을 위임한 주체임을 상기시키는 언어적 선언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택은 언어결정론적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즉,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정의하는 말이 바뀜으로써, 그 직책을 둘러싼 사고와 인식의 구조 자체가 변화한다. 대통령이 '임명된 자'라면, 국민은 '임명권자'이며, 대통령은 그 권한을 위임받아 일시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된다. 언어의 변경은 곧 권력 구조를 다시 정의한다.
 
한국에서 권위적인 권력자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호칭들은 다양한 계급질서를 반영하였다. ‘전하(殿下)’, ‘폐하(陛下)’, ‘각하(閣下)’, ‘저하(邸下)’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 위계적 권력 질서를 표현하는 언어적 기호였다. ‘폐하’는 황제에 대한 존칭이다. 드라마에서 많이 들어봐서 ‘황제 폐하’라는 단어가 익숙할 것이다. ‘전하’는 왕의 존칭이다. ‘저하’는 세자의 존칭으로 역시 드라마에서 ‘세자 저하’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각하’는 대신에 대한 존칭인데, 과거에 대통령이나 각료들에게 주로 사용되었다. 과거 60~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대통령이나 장군들을 부를 때 반드시 등장하던 호칭이다.
 
그러다가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 권위적인 표현이라는 이유로 ‘각하’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대통령님’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각하’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기능을 발휘했다. 그것은 권력을 신격화하거나 비인격화하며, 그 인물을 범접할 수 없는 국가 권위의 화신으로 위치시켰다. 대통령이 아니라 ‘각하’로 불리는 순간, 각하는 더 이상 정치적 존재가 아니라, 제왕적 존재로 부상한다. 따라서 이러한 호칭의 퇴장은 권력의 중심을 초월적 존재에서 국민으로 이동시키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는 언어의 변화이자, 권력의 탈중심화이며, 민주주의 담론의 확대이다.
 
한때 ‘군·관·민’이라 불리던 단어가 이제는 ‘민·관·군’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한 단어 구성의 변화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이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언어적 질서의 전환이다. 언어는 권위의 구조를 반영할 뿐 아니라, 그 구조를 끊임없이 재편한다. 서비스 영역에서도 언어 변화는 감지된다. 과거 기차역이나 영화관 매표소에는 ‘표 파는 곳’이라는 문구가 흔했다. 이는 공급자 중심 사고가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표 사는 곳’이라는 표현이 늘었다. 시민이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이 용어는, 민주주의적 감각이 일상화된 표현이다. 단어 하나, 순서 하나에도 철학이 담겨있다. 언어는 이러한 것이다.
 
정치인들은 언어사용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정의’, ‘자유’, ‘민주’, ‘통합’, ‘평화’와 같은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지만, 실제 말과 행동과 괴리된다면, 그 언어는 공허한 ‘기표’가 된다.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말한 ‘기표(記表)’와 ‘기의(記意)’의 결합이 끊기면, 언어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정치적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그러면 언어는 괴물이 되고 만다.
 
투표도 하나의 언어 행위이다. 그것은 단순히 용지를 제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발화이며 권한 위임의 표시다. 유권자는 공급되는 권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권력을 창출하는 주체다. 민주주의는 결국 ‘표’를 구하는 정치이다. 그러나 이 표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와 공감으로 얻는 것이다. 설득과 참여, 언어적 소통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표’야말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근간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임명식’이라는 명칭의 변경은 바로 그런 정치 언어의 민주화를 실천하는 첫 출발이다.
 
정치는 ‘말’의 싸움이자, ‘말’의 윤리다. 진정성 없는 언어는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정치는 냉소와 무관심을 부른다.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정치는 그 ‘말’처럼 움직여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말’의 전환점에 서 있다. 대통령의 ‘말’이 바뀌었고, 국민은 그 ‘말’의 무게를 지켜보고 있다. ‘말’이 곧 언어이지 않은가? 취임식을 임명식으로 바꾸면서 ‘취임선서’를 ‘임명선서’로 바꾸지 않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회 취임선서 이전에 현충원을 참배하면서, 방명록에 ‘한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국민과 함께 만들겠다’고 쓰는 것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다. 비트겐쉬타인이 한 말이 떠오른다.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 the limits of my world.", 즉 “내 언어의 한계는 곧 내 세계의 한계”라는 말이다. 그 사람의 언어가 곧 그 사람이 생각하는 사고의 한계를 결정한다는 바로 언어결정론적인 관점의 말이다. ‘취임’이 아니라 ‘임명’, 그리고 ‘국민이 행복한 나라’라는 말과 글이 힘이 되고 책임이 되기를 기대한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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