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보수나 진보나 거기서 거기인 것을!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필자가 대학교 1학년이던 시절, 교양필수인 철학개론 수업을 수강할 때이다. 강의를 하던 철학교수는 수업 중 안경을 벗으면서, “제군들이 철학을 대하는 수업태도를 보자니, 도저히 안경을 쓰고는 수업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안경을 벗는 이유는 수업태도,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안경을 쓰는 사람이 안경을 벗으면, 차라리 흐릿하게 보이니 말이다. 작금의 보수와 진보 진영이 하는 일을 보면, 안경을 벗어제친 그 철학교수가 떠오른다.
 
과거 한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구획 아래 선명히 나뉘어 있었다. 보수는 자유와 질서를, 진보는 평등과 변화를 앞세우며, 각자의 철학과 정강(政綱)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아왔다. 당시는 정치인들의 정체성과 소속이 비교적 명확했고, 진영 간의 대립 또한 일정한 원칙과 논리에 기초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정치는 더 복잡해졌다. 오늘날 우리는 진보 정당 출신 정치인이 보수 진영과 손을 잡고, 전통적 보수 인물이 진보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는 게 드물지 않다. 삼국지를 읽고 피가 끓지 않는 젊은이는 젊은이가 아니고, 피가 끓는 노인은 노인이 아니듯, 자신의 처지와 관점, 철학과 시대적 환경에 따라 변신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이념이 정치인의 노선과 행동을 결정하지 않고, 정당의 이름이 정책의 방향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이다. 유권자들조차 과거처럼 보수나 진보라는 한 축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실용적, 생활밀착형 리더십을 원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가 수렴하는 현상은 이념적 경계가 모호해지는 ‘회색지대’를 만든다. ‘회색지대’는 다음과 같은 요인으로 생겨난다. 첫째, 실용주의가 강조되며 두 진영이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비슷한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둘째,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로 일부 이슈에서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비슷해질 수 있다. 셋째, 글로벌화로 인하여 지구상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 비슷한 정책을 추진한다. 넷째, 정치적 타협과 협력의 필요성으로 두 진영이 서로 양보하면서 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기존의 정치적 구분을 약화시키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회색지대’로 몰림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경계는 갈수록 희미해진다. 그런데, 회색지대는 더 넓어졌지만, 사회는 오히려 더 분열되고 있다. 통합도,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조선 전기의 4대 사화는 권력 투쟁과 이념 갈등이 낳은 보복의 정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화근이 되어 사림파(士林派)가 탄압받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건에 분노해서 행한 정치 보복이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조광조 등 사림이 개혁을 추진하다 훈구파(勳舊派)의 반격으로 무너졌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는 명종 즉위 후 외척 간 권력 다툼이 사림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학생 시절, ‘무갑기을’이라고 첫 자를 따서 4대 사화의 순서를 열심히 외우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조의제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훈구파가 왕권과 중앙집권을 지지하며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세력인 반면, 사림파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 개혁적인 사대부 세력이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세월이 흘러 앞으로 그 어떤 탁월한 정체(政體)가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오늘날의 보수와 진보의 반목도 결국 먼 훗날, 잊혀진 조선시대 4대 사화처럼, 보수와 진보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던 시절에 유행했던 ‘이즘(ism)’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게 된다.
 
보수는 자유와 시장 자율, 작은 정부, 성장을 중시하고, 진보는 평등과 정부 개입, 큰 정부, 분배를 우선한다. 두 진영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핵심 가치를 중심으로 경제와 정책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한, 편향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짐에 따라, 빈부격차와 시장경제의 실패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운영하는 수정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제도의 원조인 미국도 1776년 독립 이후 약 250년의 역사에서, 1868년 남북전쟁 후 혼란기의 앤드루 존슨, 1974년 워터게이트로 인한 리처드 닉슨, 1998년 불륜 스캔들로 인한 빌 클린턴, 그리고 2019년과 2021년 각각 우크라이나 스캔들과 의회 난입사태의 도널드 트럼프가 탄핵소추가 되었지만, 실제로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탄핵을 당해 물러난 대통령은 단 한 명도 없다. 대한민국은 1대 이승만 대통령에서 20대 윤석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총 13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는데, 실제로 2명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1945년에서 2025년까지 80년의 역사에서 2명이 탄핵되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에서 정치계나 어느 조직에서, 심지어 스포츠계에서도 정상을 추구하는 자에게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 2부’에 나오는 대사로 그 원문은, “Uneasy lies the head that wears a crown.” 즉 “왕관을 쓴 자의 머리는 편안하지 않다”는 말이다. 권력과 정상을 상징하는 왕관을 차지하려면,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나아가 고통도 인내하라는 것이다.
 
중국 소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스스로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칭하면서 말썽을 부리던 손오공은 부처님에 의해 500년 동안 오행산 석굴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다.  손오공이 500년 형을 살고 세상에 나온 후에도 말을 듣지 않아, 관음보살이 손오공 머리에 ‘긴고아(緊箍兒)’를 씌웠다. 대통령 보궐선거에 ‘여’든 ‘야’든 자칭, 타칭, 대권 후보들이 자신들의 이기심과 당리당략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 합종연횡(合從連橫)하고 있다. 과연 스스로 왕관의 무게를 버틸만한 자들인지? 손오공의 ‘긴고아’로 자승자박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한다.
 
한국 사회는 현재 정치 양극화와 진영 논리에 깊이 빠져 있다. 후보들은 12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하며 22일간 대선 레이스를 펼친다. 이번 대선은 보수와 진보 간 극한 대결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정권을 모두 경험한 유권자들이 정치적 피로감을 느끼고, 청년층과 무당층이 확대되면서 이념보다 실용과 공정, 나아가 우리의 삶을 중시하는 흐름이 커지고 있다. 대선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통합형 리더십의 등장을 원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오랫동안 탄압받은 진보 성향의 투사였지만, 권력을 잡은 뒤에는 과거의 적이었던 백인 지배층과의 화해를 선택했다. 바로 이 만델라식 포용의 리더십이 한국 정치에서도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만델라는 ‘도덕적 정당성’ 위에 ‘관용’을 더해, 진영을 넘어서는 포용의 리더십을 실천했다. 그는 자신을 투옥했던 체제를 증오로 응징하기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용서와 통합을 택함으로써, 적대적 진영조차 끌어안는 지도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리더십은 오늘날 정치의 분열을 넘어서야 할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보수니 진보니 다 떠나, 정치인들이 입에 잘 떠올리기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국민과 통합’ 두 단어를 생각하는 ‘품격’있는 대통령이 선출되기를 바란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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