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이타미 준 -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집을 짓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제주공항에 내리니 지인이 마중을 나왔다. 오다가다 육지에서 만난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섬에서 마중까지 받은 것은 처음이다. 뒷좌석에는 손자용 안전의자가 장착되어 있었다. 손자사랑은 함께 나온 친구가 더 ‘갑(甲)’이라고 추켜 세운다. 이제 아들자랑이 아니라 손자자랑을 들어야 하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취미가 건축감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현지인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유동룡(이타미 준 1937~2011)미술관이다. 5월이 만든 그늘 길을 천천히 달리며 그의 작품 포도호텔이 무대로 등장했던 드라마 ‘협상의 기술’이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다. 호텔식당의 시그니처 메뉴 우동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다. 또 수도인 도쿄보다는 수도권의 작은 도시인 시즈오카 시미즈에 거주하는 이들(정확히는 그들의 역할을 맡은 배우)의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에 엄청 감동을 받았다는 말에 “동감!”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모르긴해도 제주도민의 진한 애향심이 공감지수를 더욱 높였으리라.

 
이타미 준유동룡 사진저자 제공
이타미 준(유동룡) 갤러리 [사진=저자 제공]

시즈오카(靜岡)는 후지산과 녹차로 유명한 동네다. 이타미 준은 시미즈(淸水)지역의 검푸른 거친 바다와 노란 귤과 하얗게 눈 덮힌 후지산의 대비감이 도드라진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높은 한라산을 등 뒤로 하고 넓은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아 지은 포도호텔 자리가 그 지역 분위기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곳이다. 건축가로써 제주도를 제2의 고향으로 인연을 맺게 된 저변에는 이런 개인적 사연이 묻혀 있었다.

 
이타미 준유동룡 사진저자 제공
이타미 준(유동룡) [사진=저자 제공]

육지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다. ‘경주타워’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경주엑스포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세우기 위한 설계공모가 2004년 실시되었다. 이타미 준의 작품은 우수상(2등)을 받았고 약간의 상금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2007년 완공된 건물은 누가 봐도 그의 디자인을 모방한 것이였다. 몇 번의 재판 끝에 20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저작권을 회복했다.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공공건물 디자인 표절에 대한 사과가 이어졌고 또 저작권에 대한 경종을 울린 사건인지라 언론매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이후 방문객의 접근이 쉬운 자리에 원저자의 이름을 명시한 제대로 된 안내표지판을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딸인 유이화 건축가도 두 발로 뛰었다.

 
미술관 내부 사진저자 제공
미술관 내부 [사진=저자 제공]

유동룡 미술관(이타미 준 갤러리, 2022년 개원)은 유이화 건축가가 아버지의 건축세계를 주변에 널리 알리기 위한 거점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구석구석 묻어있는 공간을 찬찬히 살폈다. 평소에 사용하던 생활 소품들도 벽면 한 켠을 책꽃이처럼 칸을 나누어 진열했다. 늘 영감을 받았다는 조선 백자도 보인다. 건물을 짓기 위한 아이디어를 그린 갖가지 드로잉과 설계도 그리고 건축물 사진과 모형 등 작품을 전체적으로 일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모든 내용을 한 권으로 묶은 책《손의 흔적》역시 따님이 편집했다.

 
손의 흔적 유이화 편집 사진저자 제공
<손의 흔적>, 유이화 편집 [사진=저자 제공]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생애를 간결하게 정리한 다큐멘타리였다. 영상실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만큼 흡입력이 강한 장면이 이어졌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와 자기족보는 물론 현재의 이름까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아울러 건축관도 피력했다. 집을 짓기 전에 그 땅의 지형과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듣는 일이 가장 먼저라는 소신을 고수해 왔다. 그렇게 할 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 그리고 새로운 공간이 보인다고 했다. 삼다도인 제주섬을 ‘수(水)·풍(風)·석(石) 박물관’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재해석 과정을 거친 결과물인 셈이다.

유(庾 곳집 유)씨는 한국에서도 흔한 성은 아니다. 부친은 무송 유씨 후손임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고려 건국 때 태조 왕건을 도와 활약한 유금필(庾黔弼)선생을 시조로 하는 집안이었다. 본관인 무송(茂松)은 전북 고창의 작은 마을 옛지명이다. 일본에 살면서도 한국국적을 끝까지 유지한 것은 ‘숫자가 얼마되지 않는 드문 성씨이니 씨족을 잘 보존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받았던 것도 포함된다 하겠다.
 
어쨋거나 ‘자이니치(在日)’로 산다는 것은 서민층이건 엘리트층이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엄청난 사회적 불이익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건축가로 활동할 수 있는 예명(藝名)은 필요했다. 김유신(金庾信)의 이름자에서나 볼 수 있는 ‘유(庾)’는 일본한자에는 아예 없는 글자라고 했다.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고심을 거듭했다. 어느 날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 늘 이용하는 오사카 이타미 공항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이타미(伊丹)는 두 나라를 이어주는 관문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활동 공간은 일본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1994년 간사이(關西)공항이 생기기 전에는 국제선까지 운항했던 곳이다. 오래된 이타미 공항의 흑백사진도 영상 속에 등장했다.
 
준(潤)은 절친인 작곡가 길옥윤(吉玉潤) 선생이 자기이름의 끝자인 ‘윤(일본발음 준)’으로 하면 어떠냐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준(潤)은 어감도 좋다. 그리고 한문 발음 그대로 ‘준(俊)’으로 치환한다면 ‘뛰어나다’는 의미가 되니 ‘이타미 공항을 통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모두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뛰어난 건축가’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셈이다. 양국을 동시에 보면서 세계를 향한 중도(中道)적 안목을 바탕에 둔 작명실력도 이 정도라면 수준급이라 하겠다.
 
‘이타미 준의 바다’ 영상관람을 마치고 휴식을 위해 카페에 앉아서 창문너머 빌레(용암이 흐르는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암반)를 바라보며 차를 한 잔 나누었다. 유 선생 역시 손님이 찾아오면 으레이 차를 내놓았다고 한다. 그런 일상생활까지 계승한 ‘바람의 노래’라는 차(유기농 녹차·청보리·조릿대·박하를 브랜딩한 것)가 나왔다.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에 집중하면 형상이 드러난다”는 이타미 준의 건축관까지 반영한 마실거리라는 스토리텔링이 적힌 쪽지도 찬찬이 읽었다.
 
찻자리를 파할 무렵 다시 탐라국을 찾을 수 있는 초청장을 구두로 전달 받았다.
“다음에는 수풍석박물관에 가요. 하루 방문인원을 제한하기 때문에 반드시 예약이 필수이니 미리 말씀해 주세요.”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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