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아무리 트럼프라도 시장을 마음대로 못한다

  • 트럼프 행정부 권력지형이 급변하는 이유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부 장관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제네바 합의 

관세 전면전을 벌이던 미국과 중국이 지난 10~1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극적인 합의를 도출하면서 글로벌 금융 시장이 안정을 찾고 있다. 회담 직전까지 양국 모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 회담 결과에 대한 시장의 기대치는 크지 않았으나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부 장관(63)과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이끄는 양국 대표단은 5월 14일부터 8월 12일까지 90일간 서로에게 부과한 보복관세를 115%포인트 낮추고 이 기간 동안 무역협상을 계속하기로 했다. 미·중 관세 전쟁이 이젠 휴전이자 재협상의 숨 고르기 단계에 진입한 모습이다.   
 
양국간 합의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담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끈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부상은 미국 행정부 내 권력지형 변화의 신호탄으로 주목받고 있다. 즉,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상대방을 지나치게 강경하게 밀어붙이던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들어 동맹국과의 관계 악화와 일방적 관세 정책의 역풍 등으로 정책 노선과 내부 권력 구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번 회담을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실용적이고 국제 협력을 중시하는 이들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베선트 vs 나바로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백악관은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75)의 '보호무역' 진영과 베선트 재무장관의 '공정 무역' 진영이 주도권 싸움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두 진영 모두 미 우선주의룰 전면에 내세우지만 나바로는 대규모 관세 부과와 수입 규제 등 직접적인 압박 카드를 주저하지 않는 초강경파이다.  대외 협상보다는 신속하고 단호하고 일방적 조치를 통해  단기적인 성과를 선호한다. 협상보다는 ‘먼저 조이고 나중에 풀라’는 식의 접근 방식이다.   

캘리포니아 어바인 대학의 평범한 경제학 교수였던 나바로 고문은 2016년 트럼프 캠페인에 합류한 이후 대중국 강경책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중국에 의한 죽음(Death By China)> 등 저서를 통해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적극적으로 비판해온 나바로는 트럼프 행정부 1기부터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을 맡으며 미국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주도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그의 조언을 바탕으로 철강, 알루미늄 등 주요 산업에 대한 관세를 도입했고, 미·중 무역전쟁의 중심에는 항상 나바로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전직 헤지펀드 매니저인 베선트 장관은 ‘공정한 조건’에서의 무역을 강조한다. 그는 일방적인 고율 관세 부과 대신, 미국에 불리한 무역관행(지재권 침해·보조금 등)을 겨냥해 상대국과의 협상과 합의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공급망 안정과 동맹과의 협조, 국제 신뢰의 유지 등도 배려하며 정책을 펼치는 그 노선을 두고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비교적 ‘온건하고 실용적’으로 평가하는 인물이다. 

그는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후 40년에 걸쳐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금융통이다. 특히 통화와 채권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온 그는 60개국 이상을 방문하며 국제 지도자들과 중앙은행 관계자들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소로스 펀드의 창립자 조지 소로스의 최측근으로 일하다가 2015년에는 글로벌 매크로 투자에 중점을 둔 헤지펀드 '키 스퀘어 캐피털 매니지먼트'를 설립해 CEO와 CIO를 겸임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그를 재무장관에 지명하면서 내년 미국 건국 250주년을 앞두고 "세계 최고의 경제, 혁신과 기업가 중심지, 자본의 목적지로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동시에 미국 달러를 세계 기축 통화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황금기를 여는 걸 도와줄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미 언론은 베선트 장관이 트럼프 행정부 입각 후 한때 '핵심' 의사결정할 때 소외돼 그의 입지가 약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세'로 꼽혔던 인물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어른의 축'으로 위상을 키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는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고 있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국세청장 인선을 두고 벌인 알력 다툼에서 승리했다. 머스크는 트럼프 행정부가 재무장관을 인선할 당시 베선트 장관 지명에 공개적으로 반대해온 인물이다. 이어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을 총괄하는 피터 나바로 고문을 제치고 상호관세 유예 결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실세'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제네바 합의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90일간 잠정 유예 조치이지만, 그동안 '치킨 게임'으로 치닫던 양국간 무역 갈등이 크게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세계 주식시장은 급반등 했다. 베선트 장관은 회담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양국 대표단이 어느 쪽도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고 앞으로 몇 주 안에 더 큰 합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했다.

외신들은 세계 금융시장의 투심을 안정시킨 요소의 하나로 강경론자인 나바로의 역할이 축소되고 대신 합리적인 무역정책을 주장하는 베선트 재무장관이 무역 협상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를 “어른이 방에 들어왔다”고 평가했다. 즉, 충동적이고 단기 성과에 집중했던 이전과 달리,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합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해방의날 vs 국채투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둘러싼 금융시장의 혼란은 그가 지난 4월 2일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을 선포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무차별 관세를 선포한 이후 극대화 되었다. 미국은 모든 교역국에 10% 기본 관세를 적용하고 중국 (34%), 대만(32%), EU (20%), 인도(26%), 일본 (24%), 한국(25%) 영국(10%) 등 주요 무역 상대 57개국에 추가로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글로벌 주식시장은 큰 폭으로 하락하며 투자가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특히 최고의 안전자산인 10년물 미국 국채의 투매로 채권시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를 통해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자를 해결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미 국채시장에서 투자가들이 돈을 대거 빼가며 미 금리를 상승시키고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위상을 크게 흔드는 거센 역풍이 몰려 온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트럼프였지만, 금융시장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미 국채 금리의 급등과 달러화의 강세 등 시장의 자율적 움직임이 현실화되며,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금융시장이 심각하게 요동치자, 베선트 재무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9일 백악관으로 급히 들어갔다.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면담 약속도 없이 서둘러 백악관으로 달려간 이유는 이날 아침 트럼프 주위를 맴돌며 온건 정책을 차단해온 나바로 고문이 백악관의 다른 장소에서 케빈 해셋 경제고문과 만남이 예정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베선트와 러트닉 장관이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설득한 결과,  대중국 관세는 145%까지 대폭 올라가고 대신 다른 국가들의 상호관세는 90일간 전격 보류되었다. 베선트 장관이 나바로 고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트럼프를 만나 상호관세 보류를 이끌어 낸 이후 전 세계 금융시장은 안정세로 돌아섰다. 

미 정치 전문 일간지 폴리티코는 트럼프가  '해방의 날'을 선포하고 금융시장이 대혼란을 겪은 후 강경파인 나바로의 역할이 축소되고 베선트 장관이 옹호해 온 '공정 무역 (fair trade)' 정책으로의 전환이 힘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대변인은 나바로 고문이 여전히 “무역 논의에 매우 깊이 관여 중”이며 “모든 인사가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나, 사실상 베선트가 정책의 리더십을 쥔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 백악관 인사들은 나바로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지만, 실질적인 정책 결정권이나 내부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바로의 역할 축소가 트럼프 행정부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미국 우선주의'는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기조이며, 대중 견제 정책의 큰 틀은 유지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트럼프 행정부는 당분간 극단적 보호무역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으로의 전환이 예상된다. 그렇지만 트럼프 특유의 ‘혼란-진정’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트럼프는 종종 일부러 혼란을 유발해 외부 혼선과 내부 파워게임을 동시에 관리하는 타입이다. 이번 베선트의 부상 역시 급박한 경제상황과 대외 신뢰 위기 속, 신속한 의사결정과 혼선 최소화를 위해 필연적으로 이뤄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관세 정책의 역풍으로 미국 경제 성장이 흔들리자 제롬 파월 연준 의장에게 금리인하를 요구하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파월을 '미스터 투 레이트 (Mr Too Late)"라며 당장 금리인하를 하지 않으면 해임을 추진하겠다고 시사했다. 이에 투자가들은 미국 자산 투매로 대응했다. 이후 달러화 인덱스는 한때 3년 만에 최저선인 99를 밑돌기도 했다.  

베선트 재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변동성이 커진 국제금융 시장의 주된 소통창구이자,  대통령과 행정부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까지 영국과의 관세협상을 마무리하고 일본, 한국, 인도 등 주요  교역국들과의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 시점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처럼, “어른이 방에 들어온” 무역정책 변화만으로도 시장에는 긍정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파워 게임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는 예상하기 힘들다. 상황에 따라 행정부 내 강경파가 온건파를 다시 누르고 주도권을 쥘 수 있다. 23일 갑자기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이 난항인 EU에 대해 6월 1일부터 50% 관세 부과를 위협한 것도 행정부 내 강경파의 목소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그 누구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이다.  트럼프가 아무리 통제불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다 해도 시장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시장은 ‘정치인의 꿈’이 아니라 ‘투자자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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