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
세계는 대전환의 소용돌이에 더욱 깊게 빠져들고 있다. AI(인공지능)를 위시한 기술의 변화가 급속도로 가속되고 있고, 특히 AI는 과거 인쇄술, 전기, 인터넷이 그랬듯이 우리의 사회, 경제, 산업, 생활을 총체적으로 바꿀 전망이다. 기후 위기는 지구온난화를 넘어 열대화로 악화되며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고 지구 공동체도 전쟁, 생태계 파괴, 식량·물 부족, 사회 양극화 등 악화일로다. 세계 경제와 안보도 미·중 갈등 심화와 함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전쟁 등 자국우선주의로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운 안갯속에 빠져들고 있다. 환경 및 사회, 문명의 지속 가능성, 궁극적으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직면한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고 지구촌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과학기술이 그 노력의 핵심 수단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패권의 핵심으로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국가 최우선 이슈로 자리 잡고 있다. 바야흐로 세계는 기술패권 시대다. AI를 비롯한 기술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면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 경영도 어렵다. 매년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기술 전시회인 CES에 세계인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미국 CES와 함께 우리나라가 특히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세계적 기술 전시회가 매년 4월 독일 북부 도시 하노버에서 열리는 산업박람회다. 세계 산업계의 최신 기술과 트렌드를 선보이는 글로벌 산업 기술의 메카로 주목받고 있는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주력 및 미래 산업의 기술 트렌드를 제시하는 핵심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지대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CES에 비하여 국내 기업 및 정부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속히 개선해야 할 점이다.
올해로 78회를 맞은 하노버 산업박람회는 우리 산업의 전략적 방향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여 우리 기업은 물론 정부, 대학 및 연구기관의 많은 관심과 연구가 요구된다. 올해는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 5일간 60개 국가에서 약 4000개 전시업체, 150개 국가에서 관람객 12만7000명이 참가해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전시와 콘퍼런스 프로그램에 온라인으로 참가한 관람객을 합치면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우리 산업에 던진 교훈
하노버 산업박람회는 올해 슬로건으로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를 내세우며 작년 슬로건 '지속 가능한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자'에서 강조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술 혁신을 강조했다. 그중에서도 올해 최고 화두는 단연 산업 AI 대전환이었다. 사실상 모든 전시업체가 제시한 제품이나 솔루션에 AI를 활용하지 않은 사례가 없을 만큼 이제 산업 AI 대전환은 기본이 되고 있다. 작년부터 CES와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공히 제시하기 시작한 ‘디지털 및 AI 대전환을 통한 인류의 지속 가능성 확보’가 새로운 패러다임이자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심각한 위험에 처한 환경·사회 및 인류의 지속 가능성 확보와 같은 난제 해결과 인류 비전 실현을 위해서는 AI 활용 및 대전환을 통한 인류의 지적·신체적 역량의 확장이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올해 하노버 산업박람회는 산업 AI 대전환에 의한 에너지 효율화, 탄소 배출 감축, 자원 최적화를 통해 환경의 지속 가능성에 크게 기여하고, 산업의 효율성 및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창출, 산업 인력의 교육 및 지식 관리로 경제적·사회적 지속 가능성에 획기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우리 산업에 던진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보다도 산업 AI 대전환에 민관 협력의 국가적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이 시급한 국가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 AI 대전환을 위한 미국과 유럽의 불꽃 튀는 경쟁과 협력 구도를 잘 이해하고 대비해야 한다. 세계 AI 및 클라우드 분야를 선도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AWS),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 기업과 지멘스, SAP, 슈나이더 일렉트릭, 보쉬 등 유럽의 제조 솔루션 기업 간에 피나는 경쟁을 하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는 이중적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액센추어, EY, 딜로이트, KPMG 등 세계적 컨설팅 기업들도 AI 역량을 바탕으로 이 경쟁구도에 뛰어들고 있다.
산업 AI 대전환 분야에서 이처럼 독보적 기업이 나타나지 않고 군웅할거의 전국시대가 전개되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산업 AI 대전환의 핵심 성공 요인인 AI 역량과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를 다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AI 및 클라우드 역량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제조업 등 산업 현장의 해외 이전 심화로 산업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는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은 상황이 정반대다. 산업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는 강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AI 및 클라우드 역량은 열세다. 이번 박람회에서 미국과 유럽의 세계적 기업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타 기업들과 협력 및 연합을 통한 공동 전시에 나선 배경으로 분석된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미국 및 유럽의 대·중소 솔루션 기업들과 함께 유럽의 메이저 기업들도 미국의 빅테크 기업 및 미국·유럽의 소프트웨어·컨설팅 기업과 함께 전시장을 꾸미고 운영하는 협력 사례가 대종을 이루었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영국의 항공기 엔진 기업 롤스로이스와 협력하여 개발한 AI 기반의 항공기 엔진 검사 솔루션을 제시한 것이 좋은 사례다. 마이크로소프트 전시장에 AI 검사 솔루션을 장착한 롤스로이스 항공기 엔진을 최초로 공개해 참관객 눈길을 사로잡았다. 내시경 형태의 LED 조명의 검사 시스템, AI 기반 실시간 영상 분석을 통한 솔루션 개발로 엔진 검사 시간을 기존 12시간에서 5~6시간으로 대폭 단축하여 엔진 가동시간 확대와 수익성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 아울러 롤스로이스는 항공기 엔진 가격이 아니라 항공기 운행 시간에 따라 엔진 사용 요금을 청구하는 서비스형 제품(PaaS)을 신규 비즈니스 모델로 추진하여 사업 확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한국도 산업 AI 대전환 최강국이 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렇듯 시너지가 큰 협력에 주력하지만 서로의 속내는 오월동주처럼 달라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내재적 성장만이 아니라 M&A(인수합병)를 통한 주도권 쟁탈전이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박람회 직전 발표된 대로 유럽의 메이저 제조 솔루션 기업인 지멘스가 미국의 디지털 트윈 기반 시뮬레이션 및 데이터 분석 기업인 알테어를 무려 15조원에 인수한 것이 좋은 사례다. 알테어는 이번 박람회에서 통상 20~30시간 걸리던 자동차 공조시스템 시뮬레이션을 20분으로 줄이고 판금 성형 작업의 재료 손실을 15% 이상 줄이는 획기적 기술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보여준 협력과 경쟁 사례는 글로벌 협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 기업 생태계가 잘 유념하여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산업 AI 대전환의 핵심 성공요소 중 하나인 AI 및 클라우드 역량은 미국보다는 열세이나 유럽 대비 강세로 볼 수 있어 민관이 합심하여 네이버, LG 등 국내 기업의 AI 역량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미국의 빅테크 기업과 전략적 제휴 및 협력을 모색하면 훌륭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다른 성공요소인 산업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에서 미국 대비 강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있는 유럽과는 AI 및 클라우드 역량을 공동 개발하고 산업 데이터 및 도메인 노하우 측면에서 시장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는 데이터 표준화 및 생태계 구축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특히, 독일이 제조 데이터 생태계 구축을 통한 디지털 주권 및 세계 산업 주도권 확보를 위해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매뉴팩처링-X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여 협력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산업의 Catena-X, 화학 산업의 Chem-X, 항공 산업의 Aerospace-X 등 추진 중인 10여 개의 산업 특화 데이터 생태계 구축 프로젝트에 대한 개별 또는 전체 참여 및 협력이 대상이다.
우리가 AI 대전환의 핵심인 산업 데이터와 도메인 노하우의 구조화 및 표준화를 국내외로 주도할 수 있으면 산업 AI 대전환 최강국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올해 하노버 산업박람회가 남긴 중요한 교훈이다. AI는 늦었지만 AI 대전환은 앞서 가자!
주영섭 필자 주요 이력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산업공학박사 △현대오토넷 대표이사 사장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전 중소기업청장 △한국디지털혁신협회 회장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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