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설경구 "나이 잘 먹고 싶어…얼굴에 '인생' 쓰이길"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배우 설경구(57)는 오랫동안 '리얼리즘 연기'의 대명사였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인물을 진득하게 그려온 그는 어느새 장르물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 자신만의 새로운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디즈니+ 시리즈 '하이퍼나이프'는 그 흐름 위에 놓인 작품이다. 설경구는 의학 스릴러라는 외형 안에 인간의 고통과 침묵, 후회와 책임의 서사를 촘촘히 눌러 담으며 장르 너머의 감정에 닿아간다.

"대본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어요. 그 인물을 오롯이 받아들여 주신 시청자들이 참 고맙더라고요. 워낙 이해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잖아요. 다행히 (시청자들이) 너그럽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신 것 같아요. 이런 캐릭터는 설득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인물을 설득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설득당해 주신 시청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공개 전에도, 공개 이후에도 작품을 봤는데 다행히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안도했고, 감사했습니다."

'하이퍼 나이프'는 과거 촉망받는 천재 의사였던 '세옥'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스승 '덕희'와 재회하며 펼치는 치열한 대립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이다.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 '최덕희'는 수술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제자 '정세옥'을 누구보다 아꼈지만, 그녀의 폭주를 막기 위해 직접 관계를 끊는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인연은 6년 뒤, 자신의 생사를 건 수술을 위해 세옥을 다시 찾아가면서 재개된다.

"제가 드라마 경험은 많지 않지만, 처음 캐릭터를 정해서 12부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차갑다, 뜨겁다, 밝다, 어둡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단순하게 인물을 만들어 나갔어요. 세옥은 모든 캐릭터와 연결되어 있지만 덕희는 세옥과 주로 관계가 얽혀있죠. 안 그래도 단순하게 캐릭터를 설정했는데 인물 관계도 단순하니 변주가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그래서 의학적인 부분 외에는 완전 바보라고 설정하고 접근한 거죠. 뇌에 대한 건 권위자지만 사람 관계도 그렇고 여러모로 모나고 어리숙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범위가 더 넓어지더라고요. 그런 인물의 틈을 찾아내서 변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는 최덕희 캐릭터를 두고 "사이코패스라고 여기지는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사이코패스라고 설정하면 더 단순해질 거 같았고요. 물론 과잉되어 있고 비정상적이지만 사이코패스는 아닐 거라고 보았습니다. 제가 이 인물을 연기할 때 가장 큰 숙제로 여긴 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였어요. (연기할 때는) 답을 못 찾았는데 후시 녹음을 할 때 뭔가 가슴에 와닿더군요. '세옥은 나의 비참한 청춘이니까.' 그 대사에 슬픔이 밀려왔어요. 세옥의 얼굴에 피가 떨어지는 장면이 치열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청춘 같더라고요. 소통하지 못한 괴물 같은 모습이 덕희와도 같고요."

설경구는 정세옥 역을 맡은 박은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에서 박은빈 배우 같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정말 끊임없이 말을 걸더라고요(웃음). '질문 대마왕'이었죠.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저한테 묻고, 저 역시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가 이어졌어요. 자기 얘기를 하기도 하고 제 얘기도 하다 보니 금세 편해졌죠. 나중엔 서로 개인적인 질문도 편하게 하더라고요. '선배님, 집에 가면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저도 '나는 집돌이야'라고 편하게 답할 정도로요.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면서 연기도 더 편해졌어요. 서로를 믿고 연기를 하다 보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열어서 보여주게 된 것 같아요. 작품 끝나고 배우 몇 명에게 감사 문자를 보냈는데, 박은빈 배우에게는 특히 진심을 담아 고마운 마음을 전했어요. '당신 덕분에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라고요. 그 말은 진심이었어요. 서로 믿고 겁 없이 연기했던 것 같아요. 동선을 체크하고 슛이 들어가면 부딪치는 순간도 더 재미있었고, 티키타카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즐거웠습니다."

상대 배우의 매력을 끌어내는 건 설경구의 특기 중 하나다. '불한당' '자산어보' '킹메이커' '길복순' 등에 이르기까지 설경구는 상대 배우와 긴장감 넘치는 텐션을 유지하며 남다른 케미스트리를 발휘해 왔다.

"케미스트리가 좋다는 말이 가장 기분 좋습니다. 현장에서 저는 상대 배우와 선후배가 아니라 격 없이 지내고자 해요. 그래서 그런 케미스트리가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
하이퍼나이프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하이퍼나이프' 스틸컷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가 빚은 케미스트리는 드라마 팬들의 탐구를 자극하곤 했다. 작품을 향한 애정으로 장면을 분석하고 대사에 숨은 의미를 되짚는 '연구형 팬덤'이 형성되며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세밀한 해석이 쏟아지곤 했다.

"팬들이 해석한 걸 읽다 보면 깜짝 놀라요. '아, 이렇게까지 작품을 사랑해 주는구나'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구나' 싶어요.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분석하지는 않는 편인데요. 감정에 충실히 하려고 해요. 이론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려고 하면 표현이 안 되더라고요. 저는 감정에 매달리는 편이고 분석하는 건 그분들의 몫이라고 봅니다. '불한당'도 그랬고요. '하이퍼나이프'도 세세히 분석해 주는 걸 보면서 재미를 느껴요."

설경구는 팬들이 즐길 만한 '최덕희' 캐릭터의 비하인드와 전사들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덕희는 연애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연기하려 했어요. 그러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아니길 바랐던 것 같아요. 부녀 관계는 아닌 것 같고, 멜로라기보다는… 피폐한 구석이 있죠. 그래도 저는 이 관계에 '사랑'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결국 다 주고 싶은 마음이잖아요. 덕희는 세옥에게 한 단계 위로 뛰게 해주고 싶은, 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건 결국 아주 큰 사랑이라고 느껴졌어요."

'리얼리즘 연기’의 대명사로 불리던 설경구는 이제 장르물 속에서도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다. 그의 행보를 두고 "믿고 보는 배우", "필모그래피의 기념비적인 전환점"이라는 평가가 이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에게 '변화'는 일종의 흐름이자, 멈추지 않는 갈증에 가까웠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도 똑같아요. 똑같은 걸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나이도 잘 먹고 싶고요. 얼굴에 인생이 쓰여 있다고들 하잖아요. 인생이 얼굴을 만든다고도 하고요. 저도 '잘 살고 있구나' 싶은 얼굴을 갖고 싶어요. 그렇게 나이 먹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배우 설경구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는 일반적인 인물이나 구조에 안주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비정상'이라 말할 법한 캐릭터나 이야기에서 오히려 매력을 발견한다.

"사실 현실이 더 잔인할 때도 많잖아요. 영화 같다는 말도, 때로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그런 비정상적인 이야기들, 확 튀는 인물들에 눈이 더 가요. 일반적인 것보다, 제 얘기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이 더 재밌고요. 그런 거에 끌려요. 아예 다른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에게 연기는 언제나 '과정'이다. 매 작품이 끝날 때마다 한 걸음 내딛고 있다는 감각을 되새긴다.

"사실적인 연기나, 장르적인 연기나···. 저 스스로는 지금 제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몰라요. 시간이 흐르고 제가 완성된다면 그때야 '그랬구나' 하겠죠. 아직은 다 과정 같아요. 이번 작품도 그렇고요. 감독님들이 먼저 저를 캐스팅해 주신 거잖아요. 너무 감사하죠. 저는 그냥 가는 거예요. 그런 현장이 흥분되고, 또 재밌고요. 계속 그렇게 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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