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나주 정신] (13) 고종 임금 사로잡은 판소리 명창 김창환 …"꿋꿋한 소리바디, 100년 넘게 우리 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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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현 조선대학교 미래융합대 교수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3-12-1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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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장 원각사 운영하며 '조선의 오페라' 창극 만들어

  • 예술인 집안 출신...이날치와 이종간, 임방울의 외숙

  • 정창업 신재효 문하에서 배워 득음 국악계 원로로 활동





 
명창 김창환
명창 김창환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 사설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리듬을 곁들인 퓨전 음악이다. 이날치 밴드의 이날치(李捺治·1820~1892)는 조선 판소리 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이다. 8명창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5명창이 등장한다. 김창환(金昌煥·1855~1937)이 이들 가운데 한 명이고 가장 선배다. 다른 4명은 구례 송만갑, 충남 비인 이동백, 충남 서천 김창룡, 전북 익산 정정렬 명창이다.

1930년대는 유성기 음반 전성시대였고 근대 5명창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됐다. 그 덕분에 지금도 근대 5명창의 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감상할 수 있다.

당시 신나라레코드사가 만든 유성기 음반 ‘판소리 5명창 김창환’은 1996년 CD로 다시 제작돼 보존되고 있다. 여기에는 단가 ‘고고천변’, 잡가 ‘성주풀이’와 ‘농부가’, 흥보가 ‘중타령’과 ‘제비노정기’, 춘향가 가운데 ‘이별가’와 ‘토막소리’가 수록돼 있다.

판소리는 유파별로 사설이나 성음이 조금씩 다르다. 소리꾼마다 자기 방식으로 사설과 성음을 바꿨다. 자기만의 장기인 ‘더늠’이 있기 때문이다. ‘제비 노정기’에 들어간 김창환의 ‘더늠’이 유명하다. ‘제비노정기’는 ‘흥보전’ 중 한 대목이다. 흥보 집에서 제비가 부러진 다리를 치료 받고 강남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봄 ‘보은표 박씨’를 물고 흥보 집으로 오는 과정이다.
 

 
김창환 생가터에 복원된 기념비와 동상
김창환 명창 생가터에 복원된 기념비와 동상.

김창환 음반에 수록된 ‘고고천변(皐皐天邊)’ 사설도 재미있다. ‘수궁가’의 토막소리로 용왕이 별주부를 세상에 내보내는데, 별주부가 수궁에서 처음 육지 세상에 나와서 마주치는 육지 경개의 경이로움을 노래한 시다. 이 대목이 끝난 후에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곡의 사설인 산속 동물들의 회의 장면이 등장한다.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는 김창환 판소리의 소박하고 간결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소리다. 담담하면서도 약간 쉰 소리가 담겨 오히려 애절한 느낌이 한결 절실하다. 

이도령이 춘향에게 이별해야 된다고 말하자 춘향이가 기가 막혀 이도령 앞에서 거꾸러져 기절한다. 이도령은 춘향에게 울지 말라고 달랜다. “잘 가라고 말을 하면 너를 두고 떠나야 하는 대장부 일편간장이 봄눈처럼 다 녹을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춘향이는 자기도 데려갈 것을 부탁하며 절규한다. 

판소리 발성법은 보다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내려고 힘쓴다. 또 이야기 속에 담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 곰삭은 느낌을 준다. 탁하고 쉰 듯한 목소리로 소리 대목을 불러야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런 성음과 발성을 위해 소리꾼은 득음까지 수십 번 목이 터지고 성대가 부러지도록 치열한 독공을 한다. 수십 년이 아니라 평생 공부해야 한다고 할 만큼 어려운 과정이다. 김창환의 소리는 수십 년 독공 속에서 탄생한 전라도 사람들 삶을 담은 ‘그늘’과 인생의 ‘곰삭은 맛’이 담겨 있다고 평가받는다.

 
 
김창환 명창이 태어난 마을
김창환 명창이 태어난 마을. 지금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으로 바뀌었다.

판소리 집안에서 태어난 명창···고종 총애 받아 
김창환은 전남 나주군 삼도면(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서 태어나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1904~1961)이 그의 조카다. 판소리 명창 이날치, 박기홍과 이종 간이고 소리꾼 김봉이·봉학 형제의 아버지다.

이날치를 통해 가문(家門) 소리를 얻었다. 이후 정창업과 신재효 문하에서 배워 득음했다.

김창환의 소리는 서편제로, 서편제는 비조인 강산제 박유전에서 이날치, 정창업, 정재근 등 3계열로 나뉘어 전승된다. 박유전의 소리가 정창업-김창환-정광수로 이어지면서 한 유파를 이룬다. 김창환은 신재효에게 소리를 배워 동편제와 서편제가 뒤섞인 소리 창법과 사설을 이어받았다.

나주에서 판소리 5바탕을 모두 익힌 김창환은 장성하자 한성에 올라가 고종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어전(御前) 광대로 불리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중추원 벼슬인 의관(議官)직을 받는다. 

고종 41년(1902년) 가을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칭경식(稱慶式)을 개최하기 위해 세운 극장이 원각사였다. 고종은 국창으로 대접받던 김창환을 원각사 주석으로 임명하고 이 행사를 개최하도록 명했다. 송만갑, 이동백, 강용환, 김채만, 유공열, 강소향, 유성준 등 당대 쟁쟁한 소리꾼들이 모여들었다.

 
 
국창 김창환 선생 동상
국창 김창환 선생 동상


창극으로 만든 ‘최병두 타령’에 관객들 열광
이후 김창환은 원각사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판소리와 창극 보급에 기여하게 된다. 창극은 여러 등장인물이 판소리를 부르고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양식으로 관객들이 열광했다. 지금의 오페라와 같은 공연이었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각색해 창극으로 만들어 대성공을 거뒀다. 창극 ‘최병두 타령’은 수탈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담아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 탐관오리 관찰사가 고을의 부자인 최병두를 곤장으로 쳐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 착복했지만 나중에 최병두의 억울한 사정이 신원된다는 내용이다. 김창환은 54세에 원각사에서 ‘최병두 타령’을 공연했다.

최병두 역을 맡은 김창환이 곤장에 맞아 죽어 나오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관객들이 김창환의 목에 엽전 꾸러미를 걸어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게미’가 있는 김창환의 소리에 관중들 열광
김창환의 소리는 음의 폭이 넓고 굵은 호령음이 무섭고 이면 소리와 경위가 밝았다. 그리고 계면조(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단조)에 능하고 고전에도 능통했다. 비장미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소리법을 지켰다.

김창환은 선배 명창들이 잘 다듬어 놓은 소리 ‘바디’를 늘 들으며 공부했다. 전라도에서는 음식의 깊은 맛을 ‘게미’라고 하는데 김창환의 소리에는 바로 게미가 있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소리에 열광했다.

김창환 명창은 연기 요소인 판소리의 발림(소리에서 몸짓이나 손짓으로 하는 동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김창환의 제자였던 박록주 등 여러 명창들도 그의 발림에 대해 “많이 꾸미지 않아도 신명이 나며, 익살스러우면서도 되바라지지 않고, 가벼운 몸짓에도 무거운 맛이 있고, 손 하나를 들어도 깊은 맛이 있었다”고 했다.

‘조선창극사’에는 “잘난 풍채로 좌우 왕래 일거수일투족이 미묘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김창환을 평했다.
 
김창환 명창의 묘
김창환 명창 묘


조선음률협회장 맡으며 국악계 원로로 활동
1905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소리꾼들의 활로가 막히게 된다. 김창환은 ‘협률사’를 조직해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공연한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으면서 그 공연도 폐지됐다. 일제는 협률사와 판소리, 창극 등 전통 공연이 한국인의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한다고 보고 협률사 해체를 명했다.

김창환 국창은 53세 때 협률사가 폐지되자 고향 나주로 내려가 유성준, 김채만, 박지홍, 김봉학 등 전라도 출신 명창 50여 명을 규합해 ‘김창환 협률사’를 조직하고 지방을 다시 순회했다. 61세가 되자 이동백과 함께 경성구파배우조합의 창악 강사로 참여하고 미국 빅타레코드에서 ‘춘향가’와 ‘흥보가’의 토막소리를 녹음했다. 76세에 조선음률협회 회장직을 맡고 이후 조선악정회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는 등 국악계 원로로서 활동했다. 각종 명창대회와 경성방송국 국악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눈대목을 불렀다. 당시 부른 소리는 유성기 음반 음원으로 남았다.

김창환은 서편제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현대 판소리를 다양한 분야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창극이라는 ‘판소리 오페라’ 장르를 만들고 정착시켰다. 우리 판소리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소리꾼으로 살다가 1937년 83세에 고향 나주에서 타계했다.
 
직접 가르친 아들 김봉이도 명창 대열에
김창환의 소리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슬픔을 대변한 ‘쑥대머리’로 유명한 국창 임방울로 이어진다. 정광수를 제자로 삼아 1923년부터 5년 동안 가르쳤다. 그리고 조카인 임방울을 전국명창대회를 통해 데뷔시킨다. 김창환은 나주와 광주, 담양 판소리의 선구자였다.

그가 직접 가르친 아들 김봉이(1878~1929)는 판소리 5명창 중 한 명이다. 1915년 미국 빅타레코드사가 김봉이의 ‘춘향가’ 중 ‘이별가’와 ‘기생점고’를 녹음했다. 김봉이의 판소리는 아버지 김창환에 비해 장식음이 많고 전조 현상이 보이는 등 서편제 초기 모습을 가진 판소리로 평가받는다.

‘수궁가’ 인간문화재였던 명창 정광수는 “김봉이의 소리는 사람 소리가 아니라 귀신의 소리”라고 평가했다.

국창 김창환이 태어난 전남 나주 삼도면 양화리 생가에는 그의 흉상과 기념비만 남아 있다.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DNA에 새겨진 민족음악이자 유네스코가 정한 인류 무형유산이다. 서민들의 음악, 전라도의 음악이라는 한계를 넘어 위대한 세계 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김창환의 꿋꿋한 소리 바디는 100년 세월을 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참고문헌: ‘박황’(판소리 이백년사, 사사연, 1987), ‘판소리 명창과 고수 연구’(신아출판사, 1997), ‘판소리 5명창 김창환’ CD 해설 및 사설 채록(유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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