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콘텐츠] '호빗'의 교훈…근로계약과 신의성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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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콘텐츠평론가·영화제 프로그래머
입력 2022-08-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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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 판타지의 대표작, '반지의 제왕' 프리퀼

  • 3부작, 장대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한 장의 고용계약서

  • 부와 명예의 유혹에 저항하는 믿음과 신뢰의 드라마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아주로앤피]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판타지 소설 영화화의 이면
피터 잭슨 감독이 연출한 '호빗' 3부작은 영화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판타지 시리즈인 '반지의 제왕' 3부작의 ‘프리퀄’(전작보다 과거 시점을 다루는 후속작)이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2001·2002·2003년에 차례로 개봉했고, '호빗' 3부작은 2012·2013·2014년에 걸쳐 극장에 등장했다. 특이한 점은 원작자인 J. R. R. 톨킨의 집필 순서로나 이야기 구성으로나 '호빗'이 '반지의 제왕'보다 17년 일찍('호빗'은 1937년, '반지의 제왕'은 1954~1955년 출간) 등장했지만 영화는 그 반대로 10년의 시차를 두고 후편이 전편보다 먼저 영화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관객들 입장에선 '반지의 제왕'의 이전 이야기지만 마치 속편을 보는 기분으로 '호빗'을 보는 체험을 겪게 된 셈이다.

사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같은 작가가 썼고 세계관이 이어지지만 무척 다른 느낌의 이야기다. '호빗'은 작가가 청소년을 위한 동화로 집필했고 '반지의 제왕'은 보다 성인용으로 쓰여졌다. 거기에다 원작자는 강하게 현실과의 연결성을 배격했지만 누가 봐도 작가가 체험했던 1·2차 세계대전의 반영이 작품 속에 짙게 드러나고 있다. '호빗'의 경우 당시 유럽에서 다시는 전쟁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나 믿어 의심치 않던 때의 끔찍한 비극,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어느 정도 잊히던 시절의 작업이라 소설의 마지막도 그런 낙관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은 작가가 설마 했던 또 다른 세계대전을 겪은 후라 더욱더 세계관의 대립과 심리적 갈등이 진하게 묻어난다.

이런 원작의 성격 차이가 영화화 순서의 뒤바뀜으로 인해 격변을 겪다 보니 원작의 팬들은 영화화된 '호빗'을 보고 당황스러워했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 갑자기 거대한 전쟁 스펙터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본을 들여 '반지의 제왕' 후속 시리즈를 기획해야 하는 제작사 입장에선 전편을 넘어서는 볼거리와 액션을 넣어야 했지만 그 결과 원작의 색깔이 변색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호빗' 3부작은 장대한 스펙터클을 제공하지만 소설이 주던 교훈과 여운의 재미는 다소 퇴색해 버렸다. 하지만 조금만 여유롭게 이 시리즈를 감상한다면 어렵지 않게 작가가 소설 '호빗'에서 전하고 싶었던 취지를 공감할 수 있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모든 것은 한 장의 계약서에서 출발했다
주인공 빌보 배긴스('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의 삼촌)는 ‘호빗’(반인족)들이 사는 마을 샤이어에서 명망 높고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늑한 집 앞 벤치에서 흡연을 즐길 때 떠돌이 마법사 간달프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날 밤 느닷없이 13명의 ‘드워프’(난쟁이 종족)가 들이닥쳐 빌보의 양식을 축낸다.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빌보가 어안이 벙벙할 때 드워프 같은 사람들은 1장의 계약서를 내민다. 영화와 소설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간달프는 빌보에게 쪽지를 (물론 빌보의 종이에 쓴) 건네주었다.

그가 읽은 것은 이렇다.

“소린과 일행이 좀도둑 빌보에게 인사를! 그대의 환대에 진정으로 감사함, 그리고 그대가 제공하는 전문적인 도움을 감사히 수락함.

계약 조건 : 총수익금(만약 있다면)의 14분의1을 현금 상환 인도 방식으로 지불하며 그 이상을 초과할 수 없음. 어떤 상황에서도 여행 경비는 보장됨. 만약 사고가 발생하여 수습할 방법이 없을 시, 장례비는 우리나 우리 친척들에 의해 지불됨.

그대의 소중한 수면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우리는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 미리 출발하며, 오전 11시 정각에 강변마을의 청룡정에서 존경하는 그대를 기다리겠음. 시간 엄수하기 바람.

변함없는 명예를 걸고 그대에게 봉사할 소린과 그 일행“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호빗' J. R. R. 톨킨 지음/이미애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 2장 양고기구이 중 발췌··· 이 위험천만한 미션이 걸린, 하지만 아득한 먼 옛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쌍방에 공정한 내용을 갖춘 계약서이다. ‘갑’은 13명 드워프의 리더인 ‘참나무 방패’ 소린, ‘을’은 빌보 배긴스이다. 드워프 일행은 자신들 선조의 보물을 현재 그들의 고향 ‘에레보르’에서 차지한 용 ‘스마우그’에게서 되찾기 위한 원정에 빌보를 고용하려는 것이다. 계약서상의 ‘전문적인 도움’은 빌보를 ‘좀도둑’, 즉 정찰병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다. 용이 드워프 같은 사람들의 냄새나 존재를 숙지하고 있으므로 스마우그가 알 일이 없는 호빗 종족을 채용한 것이다.

계약조건은 위험부담에 대해선 별다른 보장이 없는 게 결점이지만, (사실 일행 중 누구도 무사 귀환을 담보할 수 없는 조건이다) 수익 분배에 있어선 공정한 척도에 따른다. 고용주 입장에서 피고용자와 균등하게 수익을 비례해 나누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용주가 피고용자의 여행 경비와 (유사시) 장례비용을 책임지는 조건이다. 물론 빌보로서는 드워프들의 보물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그리고 실제로 보물을 되찾고 용을 물리칠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 정보를 공유하는데 제약이 있으므로 정보 비대칭성이 문제 될 순 있겠다.

영화에선 빌보는 용의 위험성에 놀라 혼절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선조들의 DNA에 감춰져 있던 (호빗답지 않은) 모험심이 그를 충동적으로 위험천만한 에레보르 원정에 동행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온갖 죽을 고비를 넘으며 드워프들과 우정을 쌓고 그가 샤이어에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했다면 경험하지 못할 온갖 진기한 체험을 겪는다. 그리고 운명의 산 에레보스에 마침내 도착한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큰 재물에는 의심암귀가 깃들게 마련
하지만 드워프들은 워낙 과거에 용 스마우그에게 호되게 당했던 정신적 후유증 때문에 산속 지하에 위치한 에레보르로 들어가길 두려워하며 빌보에게 단독으로 정찰을 맡긴다. 빌보는 원정 중에 골룸과의 내기로 얻게 된 ‘요술 반지’를 이용해 정체를 숨기고 보물이 가득한 궁전을 헤매던 중 용 스마우그와 대면한다.

원작과 영화에서 ‘용’이란 존재는 그저 힘만 센 도마뱀이 아니라 악의 군주가 자신의 마법을 총동원해 창조한 인공생명체로서 인간보다 훨씬 강한 마법과 지력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성골’에 속하는 스마우그는 평범한 호빗인 빌보로선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닌 규격 외 존재다. 그런 스마우그를 대상으로 빌보는 슬기를 다해 수수께끼를 즐긴다. 하지만 실은 수십 년 내내 지하에서 보물만 벗 삼아 놀고먹던 스마우그가 심심파적으로 빌보를 말 상대로 삼은 것이었다. 스마우그는 빌보와의 문답을 통해 누가 그를 보냈고 목적이 무엇인지 어느 틈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빌보를 시험하기 시작한다.

“네가 금을 조금씩 조금씩 훔칠 수 있다 하더라도, 여기 있는 걸 다 가져가려면 한 백 년 정도 걸리겠지만, 그걸 아주 멀리까지 가지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지 모르겠군··· 14분의1이나 그 정도가 계약 조건이었겠지, 그렇지? 하지만 어떻게 운반할 건가? 수레에 실어서 운반할 건가? 무장한 경비병이나 통행료는 어떻게 하고?”

그리고 스마우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호빗' J. R. R. 톨킨 지음/이미애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 12장 비밀 정보 중 발췌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재미로 해본 추산에 가깝다지만 용 스마우그가 차지한 에레보르의 황금과 보물은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가상 캐릭터 순위 2012년 버전 1위로 추정 금액 620억 달러(약 83조)에 달한다. 당연히 인간보다 작은 체형이라 ‘반인족’이라 불리는 호빗인 빌보가 현대사회보다 치안이 보장될 리 없는, 게다가 오크나 강도가 득시글거리는 숲과 황야를 지나 자기 고향으로 계약에 보장된 재화를 갖고 돌아가기란 위험천만한 일이다. 스마우그는 그런 합리적 의심(!)을 빌보에게 불어넣으며 겉보기엔 지극히 타당한 지적을 해준다.

운송 수단은 수레를 구하거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 배경은 중세 유럽을 응용한 시절이다. 도적을 피하려면 무장한 병력이 주둔하는 주요 도로로만 이동해야 한다. 물론 중세에는 그런 통행세가 영주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기에 상당한 비율을 강제로 징수했다. 수틀리면 지금처럼 대사관이 자국민을 보호해주던 것도 아닌 작고 힘없는 호빗을 강제 억류하고 몰수해도 하소연하기 마땅찮은 상황인 것이다. 눈앞에 펼쳐진 용의 엄청난 보물을 확인한 빌보에게 용 스마우그가 건네는 충고는 이제 실존하는 고민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불쌍한 빌보는 정말로 깜짝 놀라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는 산에 도착하여 입구를 찾는 것에만 모든 생각과 힘을 쏟아부었다. 그 보물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자기 몫으로 떨어질 그 일부를 언덕 아래 골목쟁이네 집까지 그 먼 길을 어떻게 가져가 것인지 분명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의 마음에서 억누르기 힘든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난쟁이들도 역시 이 중요한 문제를 잊어버렸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뒤에서 내내 그를 비웃고 있었던 것일까? 용의 이야기가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호빗' J. R. R. 톨킨 지음/이미애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 12장 비밀 정보 중 발췌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이제 빌보는 용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고 현실적인 계산에 들어간다. 막상 그렇게 고민을 시작하니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던 드워프들은 믿을 구석 하나 없이 자신만 위험천만한 용의 소굴로 들여보낸 악덕 고용주가 되어버린다. 처음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분명히 원정이 지극히 위험하고 그가 맡은 임무는 그중에서도 제일 난도가 높다는 걸 설명해주긴 했다지만 눈앞에서 확인한 용의 위세와 엄청난 보물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막강하고 부유한 존재가 겉으로는 사려 깊게 자신에게 전하는 충고는 엄청난 무게와 권위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반면에 드워프들은 의지하기엔 한없이 초라하고 약해 보이는 데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로 순식간에 격하된다.

실제로 드워프는 재물과 황금에 집착하는 종족으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후속작 '반지의 제왕'의 인상적인 도입부에서 악의 제왕 사우론이 자유 종족들을 유혹하기 위해 ‘힘의 반지’들을 만든 것이 설명된다. 가장 악의 유혹에 귀가 얇은 인간에겐 9개의 반지, 황금을 탐하는 드워프에겐 7개의 반지, 가장 강한 능력을 갖춘 ‘엘프’(요정)에겐 3개의 반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 반지들을 거느릴 ‘절대 반지’는 사우론이 차지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들 종족을 지배하려 획책한 것이다.

종족의 본성에 따라 힘의 반지들의 운명도 변한다. 요정들은 사우론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 숨겨버렸다. 그래서 절대 반지 다음으로 강한 권능을 가진 세 반지는 사우론이 끝내 회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9개 반지 주인들은 가장 잘 만든 이의 의도대로 반지에 사로잡혀 ‘나즈굴’이란 악령으로 변해버렸다. 특이한 건 드워프에게 맡겨진 7개 반지의 운명이다.

드워프들은 황금을 탐하지만 그와 동시에 ‘악’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졌다. 그래서 인간들처럼 사우론에게 넘어가진 않는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재물에 대한 탐욕이 더 증폭되어 그로 인해 다른 종족들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무리하게 보물을 찾다 위험한 존재를 깨우는 등 큰 낭패를 보는 바람에 7개의 반지 중 3개의 반지는 사우론에게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런 재물에 대한 욕망은 '호빗' 3부작의 마지막 편인 '다섯 군대 전투'에서 드워프 군주 소린과 요정, 인간들의 대립으로 드러난다. 시리즈는 결국 각성한 소린의 영웅적인 죽음과 드워프·요정·인간 동맹군의 승리로 끝난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계약서의 무게와 권위를 실감케 하는 영화 마무리
우여곡절 끝에 빌보는 모험을 무사히 마친다. 하지만 계약서는 중간에 파기된다. 소린의 고집 때문에 전쟁이 날 위기에 처하자 빌보는 드워프 종족의 성물인 보석 ‘아르켄스톤’을 훔쳐 적대하는 요정과 인간의 군영에 전달하고 그를 통해 타협이 이뤄지길 기대했기 때문이다. 요정과 인간의 군대는 드워프 종족에게 또 다른 계약의 이행을 요구하러 온 상황이다.

영화와 소설에서 약간의 설정 차이가 있지만 상황은 대충 이렇다. 에레보르 안의 막대한 재화는 대부분 드워프의 것이지만 그중에는 스마우그가 빼앗은 인간들의 것도 존재한다. 그리고 요정들이 에레보르에 세공을 맡긴 귀한 보물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몫을 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드워프들의 에레보르 원정 당시 자신들의 모험이 성공하면 부를 나눠주겠다고 맹세한 소린의 약속 이행을 요구한다. 게다가 소린 일행을 돕다가 용의 분노를 사 마을이 다 불타버려 막대한 피해를 본 상황이기도 하다. 이제 부를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지극히 적은 몫을 나눠달라며 그들은 주장한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하지만 소린은 이제 얼마 전까지의 미약하고 가난하던 존재가 아니다. 그에겐 막대한 보물과 강력한 군대를 가진 친척들이 있기 때문에 갖은 핑계를 대며 약속 이행을 거부한다. 그가 내세우는 근거는 군대를 끌고 와 고귀한 군주인 자신을 협박하는 한 금화 한 닢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끝도 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논쟁은 결국 외세의 침략, 오크들의 공격으로 흐지부지되고 겨우 전쟁에서 이기지만 많은 희생을 낳는다. 소린은 빌보의 배신에 분노해 계약을 파기했지만 정작 고용주 대표가 사망해버린 상황이 된다.

소설에선 생전에 소린이 빌보의 배신에 분노해 계약서 이행을 거부하고 그에게 보장된 14분의1 보물을 그가 훔쳐서 넘긴 보석의 대가로 인간과 요정에게 지불하겠다며 수정해버린다. 영화에선 계약서를 논할 틈도 없이 전쟁하느라 바빠서 계약서의 이행 책임 승계가 남게 된 상황이다. 소설에선 소린의 계약 변경 선포대로 빌보 몫이 인간들에게 주어지지만 인간의 지도자 바르드가 미안한 마음에 빌보에게 보물을 나누길 제안한다.

하지만 빌보는 어차피 자신이 다 차지해도 답이 없다며 겸손하게 역으로 제안한다.

“매우 친절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내게 걱정거리만 만들어 주는 겁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 보물을 다 싣고 집으로 가겠습니까? 도중에 틀림없이 전쟁이나 살인이 일어날 텐데요. 그리고 무사히 집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 많은 보물을 내가 무엇에다 쓰겠습니까? 그러니 그 보물은 당신 손에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결국 그는 튼튼한 조랑말 한 마리가 운반할 수 있을 정도의 금과 은을 채운 상자 두 개만 받겠다고 했다.

“그 이상은 관리할 수 없습니다.” 
'호빗' J. R. R. 톨킨 지음/이미애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 18장 귀향길 중 발췌.

용 스마우그가 던진 수수께끼를 빌보는 이렇게 풀어낸 셈이다. 물론 그 보물만으로도 샤이어에서 빌보의 부는 전설이 되었다. 심지어 먼 훗날 반지 전쟁이 끝난 뒤 충직한 정원사 샘의 결혼 축의금까지 넉넉하게 챙겨줬을 정도이니···(두 사건 사이의 시차는 60년이 넘는다). 그리고 그가 양도한 보물로 재건된 인간들의 도시국가 ‘너른골’과,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중간에 다리를 놓아 재건된 자유 종족들의 동맹은 훗날 반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당장 눈앞에 던져진 다 쓰지도 못할 재물에 대한 유혹 대신에 빌보가 모험 중에 깨달은 성숙함이 그 자신은 물론 중간계 전체의 공익을 위해 제대로 기여한 셈이다.

하지만 그런 전설 같은 모험의 마무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과정의 연속이다.

골목쟁이네 빌보씨의 귀환은 언덕 아래와 언덕 위, 그리고 강 건너까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으며, 상당 기간이 지나도 그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실제로 법적인 문제는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며 골치를 썩였다. 골목쟁이가 살아 있는 인물이라고 다시 법적으로 인정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매에서 특별히 좋은 물건을 싸게 산 이들은 골목쟁이네가 살아 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시간을 아끼기 위해 빌보는 자기 가구들을 다시 사들여야 했다. '호빗' J. R. R. 톨킨 지음/이미애 옮김/씨앗을 뿌리는 사람 출판, 19장 마지막 여정 중 발췌.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에서도 실감 나게 재현되었지만, 에레보르 원정과 귀향길에 이르는 13개월간 빌보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 그 결과 ‘추정 사망자’로 분류되었고 상속에 대한 생전 유증이나 직계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경매 처리되고 있었다. 워낙 빌보가 급하게 원정에 참여하게 된 셈이라 아무 조치는 물론 그의 행방조차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다.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빌보를 보고도 이웃들은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라고 윽박지른다. 그의 막대한 재산을 경매로 헐값에 낙찰받았기 때문에 그의 생존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인으로선 기가 막힐 일이지만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법적 지위를 증명받아야 한다. 소설에선 지난한 법정 공방 끝에 겨우 상당수 재산을 되찾고 나머지는 포기해버린 식으로 지극히 ‘현실적’으로 묘사되지만 영화는 그렇게 진행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간략히 처리된다.

영화 속 아득한 옛날 세계에서 주민등록증이나 그에 준하는 신분증이 존재할 리 없다. 경매 책임자는 빌보에게 자신이 ‘빌보 배긴스’라는 증명을 요구한다. 빌보는 순간 고뇌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자신의 에레보르 원정대 참가 계약서를 떠올린다. 거기에는 자신의 이름과 서명, 그리고 고용주인 소린의 인장이 찍혀 있기에, ‘공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서류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빌보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잃지 않게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모험이 시작되고 마친 뒤 돌아오게 되는 ‘서끝말의 붉은 집’이 바로 그곳이다.

장대한 판타지 모험극이나 중세 전쟁 드라마로 이 영화 시리즈를 대부분 즐기겠지만 의외로 '호빗'의 본질은 계약과 신의성실에 있다. 영화의 화려한 액션에 지칠 때쯤 은근슬쩍 색다른 각도로 영화를 다시 본다면 작가가 원작에 꼭꼭 눌러서 담아둔 교훈적 주제를 새삼 확인할 수 있을 테다. 

[작품 정보]
호빗 : 뜻밖의 여정 The Hobbit: An Unexpected Journey
2012|미국, 뉴질랜드|어드벤처/판타지
2012.12.13. 개봉(2021.11.18. 재개봉)|169분|12세 관람가
감독 피터 잭슨
주연 마틴 프리먼(빌보 배긴스 역), 이안 맥켈런(간달프 역)
수입 및 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왓차
 
호빗 : 스마우그의 폐허 The Hobbit: The Desolation of Smaug
2013|미국, 뉴질랜드|어드벤처·판타지
2013.12.12. 개봉(2021.11.24. 재개봉)|161분|12세 관람가
감독 피터 잭슨
주연 마틴 프리먼(빌보 배긴스 역), 이안 맥켈런(간달프 역)
수입 및 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왓차
 
호빗: 다섯 군대 전투 The Hobbit: The Battle of the Five Armies
2014|뉴질랜드, 미국|판타지
2014.12.17. 개봉(2021.12.02. 재개봉)|144분|12세 관람가
감독 피터 잭슨
주연 마틴 프리먼(빌보 배긴스 역), 이안 맥켈런(간달프 역)
수입 및 배급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왓차,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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