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불사조'가 되겠다는 '86'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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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입력 2022-06-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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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선거 캠프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오늘 선거캠프 사무실 정리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캠프 빌딩 이름이 휘닉스(phoenix·불사조)입니다.”

‘불사조(不死鳥)'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전설의 새로 알려져 있다. 그 새는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신령스러움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니 송 전 후보가 불사조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은 죽지만 다시 살아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이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송 전 후보는 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선거 패배 책임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송 전 후보는 책임론을 인정하고 용퇴할 의사가 없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미 6·1 지방선거 와중에 민주당에서는 86 용퇴론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박지현 공동비대위원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당을 팬덤 정당이 아니라 대중 정당으로 만들겠다"며 ‘86세대 용퇴’ 등을 요구하고 나서면서였다. 하지만 당사자들 반응은 냉담했다. 윤호중 공동비대위원장은 “이게 지도부인가”라며 책상을 ‘쾅’ 친 뒤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그것 자체가 내부에 분란이 있을 수 있지 않겠나”라고 일축했다. 우상호 의원은 "특정 세대 전체를 통으로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정합성도 떨어지고 좀 불합리한 얘기"라고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박지현 위원장이 문제 제기를 하는 과정이 돌출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당 안에 있는 실권 세력을 향해 물러나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민심의 눈높이에서 이미 86 용퇴론은 상식에 가까울 정도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문제다. 그런 사안에 대해 26세인 정치 신인이 입을 열고, 이제는 60세가 된 86 당사자들이 책상을 치며 화를 내는 광경은 마치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과연 86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연패를 당하면서도 책상을 치고 불사조를 말하면서까지 물러나서는 안 될 존재들인가.

86 정치인들이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였다. 당시 야당을 이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장청(老壯靑)의 조화를 통한 집권 전략 차원에서​ ‘젊은 피' 수혈에 적극 나섰다. 송 전 후보 이외에도 윤호중 전 비대위원장, 박홍근 원내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급 인물들 모두 이 무렵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4선인 이인영·우상호·김태년, 3선인 홍익표·서영교 의원 등도 학생운동 출신의 민주당 중진 의원들이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 초선 당선자 중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경력이 있는 당선인은 68명 중 15명(22.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정치를 시작할 때 ‘386’이라고 불렸다. 당시 이들 나이가 30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호칭이 세월이 지나면서 486, 586으로 불리더니 이제는 그냥 ‘86’이라고 불린다. 어느덧 이들 나이도 60대에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십 수년 전 30대 나이인 86들이 정치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들의 시대적 소명은 분명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세력이 다시 정치개혁의 선도세력이 된다는 것이 그런 소명이었다. 하지만 막상 86들이 과연 개혁의 기수가 되어왔던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야당을 했던 시절에도 정치개혁보다는, 권력의 우산 아래에서 자기 기득권 확보에 매달렸다는 시선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그 중심 세력이 된 이후부터는 민주주의를 후진시키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는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민주당에 선거 3연패를 안겨준 민심 이반을 초래한 입법 폭주와 내로남불의 주인공들이 바로 86그룹 정치인들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그로테스크한 역사적 장면이다. 그 시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정치인들이 막상 권력이 되고 나니 민주주의쯤은 훼손해도 된다는 태연한 모습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그리고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지켜봐왔다. 이런 마당에 아직도 86들이 굳이 불사조까지 되어 끈질기게 정치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송영길 전 후보가 말한 피닉스는 이집트 신화의 불사조인 베누에서 유래한다. 아라비아에 살았던 이 새는 500년마다 이집트에 있는 사원으로 날아가 제단에서 자기를 불태웠다.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사조는 화염을 뚫고 솟아올랐다. 불사조는 불에 타 죽은 자신의 재에서 부활하여 50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송영길 전 후보 말고도 불사조를 내세웠던 정치인들은 많았다. 과거 정당을 옮겨 다니며 당선과 낙선을 반복했던 이인제 전 의원도 '피닉제'라는 별칭까지 사용하며 자신이 불사조임을 내세웠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지난해에 의원직을 상실한 이상직 전 의원도 자신은 불사조라며 “어떻게 살아나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걸핏하면 불사조임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신화 속에 나오는 불사조는 자기 희생적인 존재였고, 그 부활은 죽음에 대한 삶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자기 희생이 아닌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는 불사조들이니, 신화 속 불사조와는 그 의미가 정반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제는 죽을 때라고 했는데도 굳이 다시 살아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삶의 승리와는 아무 인연이 없는 집착과 욕심일 뿐이다. 그러니 불사조가 되겠다는 86 정치인들의 다짐은 단지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겠다는 고백에 불과한 것이다. 송 전 후보가 ‘피닉스’ 얘기를 꺼냈다 한들, 어디 그만을 향해서 하는 얘기겠는가. 86 정치인들 모두에 대한 얘기다. 이제는 86들이 정치를 계속해야만 할 시대적 소명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에 대해 당사자들도 더 이상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86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소명이 있다면 아마도 자신들의 퇴장이 아닐까.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대학원 사회학 박사 ▷경희대 사이버대학교 NGO학과 외래교수 ▷한림대 사회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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