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제심서] 자유와 개방의 호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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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입력 2022-02-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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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관여가 급증하고 있다. 이른바 '경제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다. 그동안 경제는 자유와 개방, 창의와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대립과 비난으로 얼룩진 정치의 세계와는 달리 효율과 상호 이익이라는 합리적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세계는 이러한 효율성과 합리성을 신뢰하였고 이 이념을 실현하고자 부단히도 국제사회의 협력 시스템을 갈고닦아왔다. 그 결과 세계는 국경을 넘어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되어 왔고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가 수많은 국가와 기업들의 길고 복잡한 공급망을 통해 세상에 제공되는 경제구조를 완성하였다. 이 시스템을 통해 많은 국가들이 빈곤에서 탈출하였고 인류는 역사상 최대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였다. 이러한 번영의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그늘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는 지난 30여 년을 자유와 번영의 시기로 기록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역사의 거대한 시계추는 자유와 개방에서 관여와 견제로 방향을 틀고 있다.

국가는 왜 경제에 대한 관여를 강화하고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 경제의 정상적 운영과 안정적 사회활동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는 길고 복잡해진 공급망에 드리워진 위험들을 경험해 왔다. 이러한 위험은 자연적 위험과 인위적 위험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적 위험 사례 중 하나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일본의 공급망 붕괴 사태이다. 2011년 3월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일본 동북 지역에 위치한 많은 부품·소재 공장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 결과 일본의 자동차 생산이 큰 타격을 받았다. 대지진 직후인 2011년 2분기 일본 자동차 산업의 영업이익은 공급망이 정상화된 2012년 2분기 영업이익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공급망을 복구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기업은 안간힘을 썼다. TV와 신문에서는 일본 기업들이 얼마나 신속하게 훼손된 공급망을 복구하는지 자랑스럽게 보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도요타 등 거대 기업은 자사의 거대한 부품 조달망을 상세하게 조사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등 공급망 관리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진은 공급망을 교란하는 단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자연재해는 이외에도 너무나 많았다. 2011년 태국에서 발생한 대홍수 또한 그 예이며 요즘 우리가 지겹게 경험하고 있는 팬데믹은 규모와 기간 면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보여 준 사례이다.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재해로 인한 공급망의 단절과 이로 인한 생산, 유통, 소비 등 경제활동의 교란, 나아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게 되는 현상들은 앞으로 더욱 빈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꼭 필요한 물자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인위적 위험의 대표적 사례는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과 이로 인한 공급망 단절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가 강화되면서 미국은 중국에 대한 각종 규제를 총동원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에는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 제품에 대해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관세전쟁을 개시하였고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조치에 더해 전략물자에 대한 수출 통제, 전략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 통제, 핵심 기술에 대한 보호조치 강화 등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동맹국들에도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면서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암암리에 요구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 등 핵심 품목의 대중국 의존을 낮추기 위해 공급망 재편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자국 내에 생산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관련 품목의 대표적 기업들에 미국에 투자할 것을 요청하고 이를 유인하기 위해 수백억 달러의 기금을 통해 보조금을 뿌리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도 이러한 압박과 유인으로 미국에 대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일본은 금년 1월에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이 법은 기시다 총리가 중시하고 있는 일본 경제안보전략의 중요한 법적 기초를 제공한다. 이 법의 배경에도 중국의 위협이 있다. 중국이 군사적으로 전용할 우려가 있는 기술,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해 정부가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개입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1)특허 출원의 비공개 제도 도입 (2)공급망 강화 (3)첨단 기술의 민관 협력 (4)중요 국가 인프라의 안전성 확보가 이 법의 골자다. 국가는 ‘안전보장상 중요한 기밀’이라고 판단한 경우 특허의 비공개를 요구할 수 있다. 예상되는 특허 수입은 정부가 기업에 보상한다. 반도체나 의약품 등 ‘특정 중요 물자’로 지정된 품목은 국내 개발과 생산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중요한 부품과 소재를 타국에 의존하지 말자는 취지다. 이를 위한 보조금은 풍족하게 배정한다. 정부는 특정 중요 물자의 개발·생산 계획을 심사하여 지원 대상 기업을 선정한다. 기업이 정부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때 이를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가 가지게 된다. 정부가 민간과 협력하여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지원하는 기금을 설치한다. 기술 개발에도 정부 보조금이 투입되며 나아가 정부가 보유한 기술정보까지 민간 기업에 제공한다. 통신, 전력, 항공, 철도 등 국가 중요 시설에 소요되는 설비나 기기를 도입할 때 국가의 심사를 받도록 한다. 사이버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의심이 가는 중국 제품의 사용을 원초적으로 막겠다는 의도다.

앞에서 살펴본 위험의 공통적 특징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다. 자연재해는 예측하기 힘들다.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시행하는 각종 규제 또한 변덕스럽다. 과거에는 정부의 변덕스러운 규제와 지원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노력해 왔으나 이제는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거나 칭찬하는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각자도생, 끼리끼리의 패거리 경쟁이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다자 체제는 약화될 것이다. 앞서 말한 자유와 개방의 30년을 주도해 왔던 WTO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아무도 WTO를 통해 자유와 개방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 자들끼리의 응집력은 강해질 것이나 신뢰를 얻지 못한 자는 버림을 받을 것이다. 신뢰가 거래의 핵심 요소가 될 것이며 효율이나 이익이 아니라 가치나 이념이 다시금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기술과 공급망의 탈동조화와 블록화가 진행될 것이며 그 이유로 기술 동맹과 핵심적인 소·부·장의 조달 경쟁이 격화될 것이다. 자국이 보유한 기술과 중요 물자를 바탕으로 상대국을 협박하고 위협하는 현상이 많아질 수도 있다. 에너지, 식량, 광물자원의 무기화가 진행될 우려도 높다. 다만 지난 30여 년간 진행된 세계화로 인하여 다행히도 극단적인 블록화와 분열의 세계가 지배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상대가 없이 나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자유와 개방, 그리고 관여와 견제가 묘하게 공존하는 그런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탈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찾아오는 또 다른 대전환의 격변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이 그것이다. 결국 이 세 가지 요소의 조합이 향후 수십 년의 국가 경쟁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각국 정부는 재정을 동원하여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반도체, AI, 데이터 분석, IoT, 플랫폼 기업 육성 등 디지털 세계를 통해 구현되는 각종 제품과 서비스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각국 정부는 사활을 걸고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주력 기업의 투자 유치, 국가 주도의 기술 개발에 힘을 쏟을 것으로 보인다. 기술 개발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간에 기술 동맹을 맺으면서 기술 개발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고 개발된 기술의 배타성 또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첨단 제품의 생산에 소요되는 각종 원자재의 확보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그린 전환의 핵심이 되는 전기차, 배터리, 재생에너지, 수소에너지 분야의 중요 광물자원은 소수의 국가·지역에 편재되어 있는 특성이 있어서 이러한 자원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가열될 것이다.

2019년에 벌어진 일본의 수출 규제, 코로나19로 인한 의료용품의 품귀 현상과 조달난, 그리고 최근의 요소수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지난 수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목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를 안보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국가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마음속에 찜찜함이 남아 있다. 마치 사이좋은 이웃들이 사는 마을에는 담이 낮듯이 우리는 서로 장벽을 낮추고 경계심을 낮추는 사이좋은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불신과 분열은 성벽을 높게 쌓고 창칼을 갈게 한다. 성벽을 쌓고 창칼을 가는 데는 많은 비용이 따른다. 왜 우리는 또다시 그러한 세계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세계를 이끄는 패권국가는 왜 그러한 세계를 만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참으로 안타깝고 화가 치미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희망이 그러한 세계로 우리를 다시 인도하지는 못한다. 전 세계가 국가 중심의 자본주의로 회귀하고 국가를 동원한 경쟁 체제에 진입한다면 우리가 당면하는 현실의 시련은 예전에 비해 훨씬 가혹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설치하고 경제안보 관련 이슈를 점검하는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산업부, 외교부 등 각 부처에서도 경제안보외교센터, 무역안보TF 등 조직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경제안보 핵심 품목을 지정하여 이를 집중 관리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정부에 의한 관여는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의 관여를 경제안보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으로 용인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의 국회 심의를 앞두고 있는 일본에서도 이 법의 제정을 놓고 찬반양론이 있다. 안보를 이유로 정부의 개입을 무조건 용인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이 위축되지 않도록 벌칙은 최소한으로' '규제보다는 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규제는 예측 가능한 형태로 도입할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계는 '경제안보는 필요하나 민간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 주기'를 원하고 있다. 한국 경제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정부와 민간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자유와 개방의 호시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정성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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