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순 칼럼] 고장난 나침판 같은 관행주의 외교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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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호주, 미얀마 대사)
입력 2021-12-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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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

민주화 이후 들어선 여러 정부는 예외 없이 실사구시에 입각한 실용외교를 표방하였지만, 우리 외교에서 제대로 된 실용외교를 목도한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아는 실용주의를 제대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는 장애요인, 즉 다른 사고방식들을 짚어보고 이들을 억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전 생애를 걸쳐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며 살아야 한다. 어떤 결정은 쉽고 늘 습관적으로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선택은 이익/비용 판단이 불분명하여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런 이익/비용 분석이 명료하지 않을 때 선택을 앞두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선택을 하는지를 살펴보면 대체로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한 경우는 이익/비용 분석을 해보고 실익이 있어 보이면 별 전례가 없더라도 이를 추진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실용주의라 할 수 있다. 다른 경우는 면밀한 장단점 분석을 거쳐 선택을 고심하기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습성으로 인해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를 관행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의 경향성은 개인을 넘어 큰 조직과 국가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익에 따라 새로운 시도롤 해보려는 실용주의와 안전지대(comfort zone)을 잘 벗어나지 않으려는 관행주의 세력이 종종 대립한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역사는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세력들에 의해 진보를 이루어 왔고 이런 세력들이 역사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이 평안하고 별 변화가 없는 시대에는 과거에 잘 작동해 왔던 관행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나 세상이 요동치는 시대에 들어서면 이런 관행주의로는 변화에 대처하기가 힘든 법이다.
 
지금 국내외 정세는 대변환기로 접어들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지난 70여년이 미국의 주도하는 최장의 평화기, 즉 치세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혼세를 거쳐 잘못하면 난세의 시대로 접어들 기미를 보인다. 이러한 격변기에 우리는 과거의 관행과 문법을 가지고 대처해서는 안 되고 바짝 긴장한 가운데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우리의 항로를 끊임없이 변침해 나가야 한다. 국제질서를 떠받치던 중요한 기둥들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는데, 과거에 통했던 것이 앞으로도 계속 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의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큰 파도가 어디서 오는지 계속 주시하면서 우리의 항로를 계속 수정해 나가야 한다. 미국이 발을 빼는 중동에서 지금 각국이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합종연횡에 분주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국제 정세를 보는 우리 시각들은 아직 구시대적이고 냉전적인 사고에 고정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우리가 당면한 현안들에 대한 해법 모색에서도 전문가들이 양분된 시각을 가지고 늘 주장하던 그 해법을 내놓고 계속 논쟁을 하는 경향이 많다. 나침반 바늘의 양끝은 항상 떨리면서 끊임없이 남북을 찾아내며 가리킬 때 그 효용이 있는 법이다. 나침반이 떨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을 때 나침반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물건이 되고 만다. 이처럼 우리 외교 행보를 국익이 가리키는 방향을 찾아 계속 변침해 나가는 것이 실용외교다.
 
그리고 국제적 정세와 관련하여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배제해야 할 또 다른 두 종류의 사고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과한 자기중심주의와 다른 하나는 과한 피해주의가 그것이다. 우리의 외교안보 관련 담론의 흐름을 보면 한 부류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면서 낙관적인 사고로 우리의 희망 사항과 선의들이 다른 나라에 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주장을 편다. 다른 부류는 우리나라는 아직 굉장히 취약한 상태이며 모든 것을 강한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 우리 안위를 담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우리가 피해자가 된다는 생각에 가급적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을 선호한다.
 
앞으로 닥쳐올 험난한 국제 정세의 파고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두 부류의 사고를 배격하고 우리는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 국제 정세의 변화 속도는 우리가 과거의 길에 그냥 안주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며 우리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우리가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아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도 더 머뭇거릴 시간이 별로 없다. 더 시간이 흘러가면 통일을 위한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커지면서 한반도에서 신냉전 구도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종전선언, 북핵 문제도 누가 먼저 움직여야 하느냐는 논쟁으로 지새울 것이 아니라 현 교착상태를 타개할 창의적인 해법을 모색해서 협상이 움직이게는 해야 한다.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불신이 쌓여 서로 먼저 움직이지 않으려는 상황을 방치하면 핵 위협이 저절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고조될 것이다. 남한과 국제사회는 북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북한은 고립감과 공포로 인해 먼저 움직이지 않으려는 기싸움을 하다 보면 민족의 활로는 완전히 차단될 것이다. 약간이라도 여유가 있는 측이 ‘의심 속의 믿음(benefit of doubt)’을 가지고 상황을 견인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상대가 우리 요구를 다 들어준 다음에 우리가 보상을 해주자는 것은 협상의 기본자세가 아니고 이루어질 가능성도 없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해보는데도 북한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단호히 우리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북핵 문제가 우리 외교 전체를 삼키는 블랙홀이 되는 것을 더 방치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아직은 조심하는 가운데 평화에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움직일 때 생길 수 있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며 나아가는 것이 창의적인 전략이고 실용외교다.
 
또한 모든 세상사가 이분법적으로 명쾌하게 결론이 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특히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이분법적인 선택은 논리적 명료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인 위험을 수반한다. 그런 위험에 대한 대응책을 상세히 검토하고 대비도 하지 않은 채 입장의 명료성만 선호하는 관념주의, 명분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는 엄중한 시기에 우리는 처해 있다. 지금 우리는 주변의 상황 변화를 면밀히 계측하면서 화학공장의 복잡한 배관들의 안전밸브를 미묘하게 조정해 나가듯이 우리에게 쏠리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조심성을 익혀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과거를 잊어서도 안 되지만 과거에 발목 잡혀서 미래를 망쳐서도 안 된다. 과거와 현재가 다투면 미래가 피해를 입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필부도 가정을 책임진 가장일 경우에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것이 세상살이다. 엄중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국의 감정에 충실한 외교를 추구할 경우 많은 국익이 손상당하는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대가 있는 외교에서 실익이 있다면 너무 자존심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싸움의 방식과 장소를 자기가 정하지 못할 경우 싸움의 시기라도 유리한 때를 골라야 한다. 이마저도 못하면 싸움의 승패는 불 보듯 뻔하다. 정신적 승리를 위하여 힘든 싸움을 벌이는 무모함을 피하는 것이 실용외교다. 실용주의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국익의 기반 위에 면밀한 손익계산을 하여 도출되는 외교적 방책이며 새로운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외교다. 다음 정부에서는 이렇게 국익에 기반한 실용주의 외교가 제대로 전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백순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독문학과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 특임대사 △주호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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