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 칼럼] ​노무현의 꿈은 이루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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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입력 2021-05-2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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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사마천의 <사기>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나온 백이와 숙제는 부끄럽게 사느니 굶어 죽기를 택한 지조와 절개의 인물로 수천년 역사에 전해져 내려왔다. 그런데 루쉰은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실린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 두 사람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루쉰이 재해석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에서는 그들이 사슴의 젖도 모자라 아예 잡아먹으려는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 굶어 죽은 인물로 나온다. 루쉰은 백이와 숙제에 관한 지조와 절개의 신화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루쉰은 권위에 대한 어떠한 숭배도 인정하지 않고 전설의 이면까지도 파헤친다. 그래서 신화적 영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언제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브레히트의 희곡 <부상당한 소크라테스>가 또한 그러하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나온다. 철학자의 자존을 위해 독배를 들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쟁터에서 오직 생존에 급급하여 잔꾀를 부리는 가난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적군이 오자, 소크라테스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다가 선인장 가시에 발을 찔린다. 놀란 그는 적군을 향해 얼떨결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그 얘기를 잘못 전해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하며 열광한다. 소크라테스는 차마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안티스테네스, 알키비아데스 그리고 아내 크산티페 앞에서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고백한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와 같은 거짓된 추상적 전언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주했다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일이었다. 루쉰이 그러했듯이 브레히트 또한 소크라테스를 평범한 인간의 지평으로 끌어내리면서, 누구도 거역하기 어려운 전쟁의 영웅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그 얘기들뿐이 아니다. “법에 맞는 올바른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안으로 향하건 밖으로 향하건 만나는 대로 바로 죽여라”고 했던 중국 당나라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 얘기도 어떤 것에 구속당하지 않아야 자유자재한 삶을 산다는 의미였다. 제자들을 모아놓고 “더 바람직한 일은 이 차라투스트라의 존재를 수치로 여기는 일이다”라며 “너희들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라”고 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그 모두가 어떤 권위나 우상에도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는 주문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2주기 추도식이 지난 23일 봉하마을에서 있었다. 올해에도 여야 정당의 많은 정치인들과 추모객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렸다. 고인의 불꽃 같은 삶을 추모하는 행렬은 그를 존경했던 시민들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발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참배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의식처럼 되었다. 큰 선거에 나갈 때나,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혹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세상에 알리려 할 때,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봉하마을을 찾곤 한다. 이제는 어쩌면 상투적이 되어버린 그런 광경 속에서 고인에 대한 추모는 정치적인 것이 되곤 한다. 아팠던 기억을 돌아보면, 2009년 노무현의 죽음은 어느 하나로만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대개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 죽음에는 모욕에 대한 결연한 항거,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에 대한 자책, 죽음이라는 결단과 그것이 결과할 무책임함이라는 서로 다른 색깔의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죽음은 진영에 따라 나뉘어져 미화만 할 것도, 손가락질만 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 가운데 어떤 면은 발언이 허용되었고, 다른 어떤 면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어 왔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무현의 얘기를 천상(天上)의 영웅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그가 가졌던 꿈과 한계에 대한 지상(地上)에서의 얘기로 전환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침 이번 추도식에 참석했던 김부겸 국무총리는 추도사에서 자성의 얘기를 꺼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불신과 갈등이 어느 때보다 깊다"면서 "작은 차이를 부풀리고, 다름을 틀림으로 말하며, 우리와 너희를 나누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 김 총리는, 지금의 분열된 대한민국 상황에 대해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문재인 정부 국정 2인자의 입에서 나온 이런 고백은 만시지탄의 것이지만, 이제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4년 전 대통령이 되어 봉하마을 추도식에 참석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 지난 20년 전체를 성찰하며 성공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성찰의 태도는 보이지 않았고 지난 20년의 실패들이 그대로 답습되는 현실이 전개되었다. 노무현은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 정치인이었고,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지역주의와 분열의 정치를 해소하려 했던 대통령이었다. 노무현은 분열된 현실을 넘어 통합으로 가려는 꿈을 꾸었지만, 그의 동지 문재인은 분열을 방치한 채 통합의 약속을 방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노무현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과연 노무현의 꿈은 이루어진 것인가를 묻게 된다.

김부겸 총리가 분열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했던 그날, 함께 추도식에 참석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치 검찰, 검찰 정치는 민주주의의 독초다." 이제는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겨냥한 얘기였다. 실제로 추 전 장관은 이번 대선에 출마하여 ‘윤석열 저격수’로 나설 태세이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분열과 증오로 가득찬 마음을 갖고 봉하마을을 찾기도 한다. 대체 이들에게 있어서 노무현은 누구이고, 노무현의 꿈은 무엇일까. 때로는 고인에 대한 애도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에게 애도는 곧 정치이다. 역사란 때로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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