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문제로 수많은 순교…가톨릭 주교단이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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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위원
입력 2021-04-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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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⑮ 정양모 신부 <上>

정양모 신부의 집안은 증조부부터 6대가 가톨릭을 믿는다. 고종 때인 1887년 증조부모가 가톨릭에 입교했다.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온 후 100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은 1886년 5월 1일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다. 이 조약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기함으로써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참수당한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 정 신부의 집안은 다음 해에 가톨릭에 입교했다.
정 신부는 1960년부터 10년 동안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한 뒤 광주가톨릭대학과 서강대학에서 교수를 지내고 말년에는 성공회대로 옮겨 정년을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그에게 신부와 교수 중에 어떤 호칭을 쓰는 게 좋겠느냐고 묻자 “당연히 신부”라는 답이 나왔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는 아름다운 화원이 조성돼 있었다. 인터뷰어가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었네요”라고 말하자 정 신부는 “글라라씨의 작품”이라며 옆에 있는 비서를 가리켰다.
정양모 신부의 어머니는 아들 다섯에 딸 셋을 두었는데 3형제를 신부로 만들었다.
“우리 집안에선 어머님이 가장 돈독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상주시 퇴강성당 신부님이 1년에 두 번 우리 마을에 와서 미사를 집전했어요. 그 때마다 우리 형제에게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에 가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공부를 하고 신부가 되거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한국인 신부가 많지 않았습니다. 페낭에서 공부하고 신부가 된 한국인이 모두 12명인데 그 신부는 11번째 신부였습니다. 그 분은 늘 여신도들에게 ‘부지런히 아들을 낳아서 둘이 태어나면 하나는 신학교를 보내고, 셋이 태어나면 둘을 보내고, 다섯이 태어나면 셋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다른 부인들과 달리 어머니는 그 말을 명심해 아들이 다섯이 태어나자 곧이곧대로 셋을 바친 셈이죠. 어머니는 무척 총명한 분이라 ‘신부가 되어라’ ‘신학대학에 가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남들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죠. 우리는 어머님이 끄는 대로 따라간 것이죠.”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원에서.


-신부 삼 형제가 <예수모습 성경미술>이라는 책을 공저로 펴냈던데요?
“내가 맏아들인데, 신부 삼형제가 학창 시절에 미술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미술에 관심이 높았어요. 셋이서 가끔 1700년 가톨릭 미술사에서 예수님의 조각과 그림을 주제로 한 좋은 작품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러다가 예수의 일생과 관련된 명화를 모아서 책으로 내자 해서 <예수모습 성경미술>을 출간했습니다.”
<신동아> 2007년 7월호에 인터뷰어가 꾸려 나가던 ‘황호택이 만난 사람’에 정진석 추기경(1931~2021년) 인터뷰가 실렸다. 그 인터뷰에서 정 추기경이 가톨릭 박해의 역사를 한참 설명했다.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쓴 마테오 리치는 동양인들의 제사를 인정했는데, 중국에 와있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제사가 ‘미신’이라는 보고를 올리면서 교황청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라는 결정문을 내려보냈다. 이후 가톨릭 신자들이 조상의 위패를 없애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됐다. 정진석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팩트만 설명하고 교황청과 조선 왕조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정 신부의 조상이 박해시대의 신자는 아니지만 제사 문제로 안 죽어도 될 수많은 신자들이 죽었는데요. 지금은 가톨릭과 일부 기독교 종파가 제사를 허용합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한다’는 다석 사상의 시각에서 본다면 제사 문제에서 비롯된 조선의 가톨릭 박해를 어떻게 보는지요?
“제사를 금지하는 베이징 주교의 칙령에 따라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발각돼 순교한 사건이 진산 사건입니다. 1791년 전라도(지금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에 사는 윤지충 선비가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위패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 해가 정확히 1791년입니다. 가톨릭에선 그때부터 148년간 제사를 지내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교황청이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발표해 ‘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추모하는 예식이다. 그것을 금할 필요 없다. 이제 가톨릭 신자들은 제사를 지내든지 추모 미사를 지내든지 맘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교황청이 문화적 이해가 부족해서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중국 일본에서도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이 제사 문제로 순교한 사람이 어림잡아 만 명은 넘을 것입니다. 가톨릭의 최대 오류 중의 하나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주교단에서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진석 주교님이 신동아 인터뷰에서 그런 말씀을 하면서도 민족 앞에 주교단이 가톨릭을 대표해서 사죄하지 않은 게 안타깝네요.”
정양모 신부와 정진석 추기경은 가톨릭대학 신학과 동기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 공대 2년을 마치고 가톨릭 대학에 편입했다. 나이는 정 추기경이 네 살 더 많다.
-고을 수령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할 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밟지 않으면 참수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례가 더러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일본에서는 예수님 얼굴을 새긴 조각품이나 그린 그림을 놓고 신자들에게 밟으라고 했어요. 밟는 것을 배교 행위로 본 것입니다. 일본에서 신도들에게 밟으라고 내놓은 예수 조각이나 그림을 일본말로 ‘후미에’라고 합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에 이어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중동 사막지방에서 발생한 종교들이다. 정 신부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이스라엘에서 현장 공부를 했다. 그는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책에서 유일신 종교가 모두 사막지대에서 생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유일신 야훼를 믿는 유대교, 유일신 알라를 믿는 이슬람교의 독선과 배타(排他)는 생래적이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사막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오아시스뿐이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도 단지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잇는 대상로(隊商路)다. 그러니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절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도 메마른 중동 사막 풍토에서 생겨난 까닭에 유대교 이슬람교 못지않게 독선과 배타에 젖어 있다.’

유일신 종교는 모두 중동 사막지대에서 발생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왔고,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복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출생지인 이란에서도 밀려나 현재 인도 파키스탄 등에 거주하는 이란계 주민이 믿는 소수 종교로 전락했지만 유일신 사상의 원조(元祖)다. 유대교가 이 종교에서 유일신 사상을 전수받았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BC 628~BC 551)는 라이벌 승려에 의해 살해됐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면서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의 박해를 당하게 되자 기원후 8세기부터 일부 신도가 남아시아로 이주해 지금도 신앙을 지키고 있다. 이들을 파르시라고 부른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가 파르시의 후예다.
“유일신의 할아버지뻘 유대교, 아들뻘 그리스도교, 손주뻘 이슬람이 모두 중동 사막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로아스터교도 이란 사막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외 없이 유일신 종교가 생겨난 곳을 보면 척박한 풍토지요. 그런데 농경문화가 발달한 한국이나 중국, 일본, 인도에서는 다신교(多神敎)가 성행했죠.”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침략과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네 민족을 사랑하는 유일신(唯一神)이 마침내 자신들을 멸망과 고통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선민(選民) 의식에서 유일신 종교를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던데요.
“그 말씀도 옳지요. 세계종교사 시각으로 크게 보면 대체로 중동 유일신, 계시(啓示) 종교 말고는 다신교예요. 다신교도 행태를 보면 평상시에는 여러 신들을 믿습니다. 가장 신이 많은 나라는 인도죠. 인도 국민보다 신이 더 많다고 하거든요. 그만큼 헤아릴 수 없어요. 그런데 평소에 다신교이거나 신앙생활을 전혀 안 하던 사람들이 엄청난 위기에 처하면 하느님, 유일신을 찾아요.
내가 생생하게 경험한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시골 마을에 하나뿐인 재봉틀이 없어진 거예요. 사람들이 재봉틀을 훔쳐서 몰래 팔아먹은 사람으로 어느 부인을 지목했습니다. 부인은 자신이 도둑이 아님을 증명할 길이 없으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이 알고 내가 안다. 나는 가난하게 살지만 도둑질은 한 적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신앙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그 부인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하자 입에서 갑자기 하느님이 나오는 거예요. 다신교의 행태를 보면 평상시에는 여러 잡신을 섬기다가 엄청난 위기가 닥치면 잡신들에게 기도해봐야 소용 없으니 유일신인 하느님을 찾아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을 겪고, 이스라엘에 들어왔지만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여튼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메디나도 그렇죠. 한국 사람이 볼 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살기 어려운 곳이에요. 거기에서 유일신, 계시(啓示) 종교가 태어났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은 한두 번 위기를 겪은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 같으면 농사 지을 엄두도 못 내는 박토(薄土)를 개간해서 겨우겨우 살았습니다. 이집트에 살 적에도 항상 위기상황이에요. 그런 위기에서 유일신, 계시 종교가 나왔죠. 인도 평원에서는 유일신이 아니라 인생의 이치와 법칙을 따지는 이법(理法)종교가 나타났습니다. 불교 유교 도교 다 합쳐서 이법종교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느님에게 구원을 간청하기보다 먹고살 만하니까 시원한 툇마루에 앉아서 인생의 이치와 법칙을 명상하게 되는 것이죠. 문화가 그렇듯이 종교도 풍토에 연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셋이 나온 집안에서 대를 이을 동생의 손자와 함께 망중한.


-계시 종교는 무엇을 말합니까?
“이법종교, 불교나 유교에선 스스로 깨치지요. 그런데 유일신 종교에선 스스로 깨칠 수가 없는 거예요. 유일신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고 사는 것이지, 인간이 스스로 인생의 이치와 법칙을 깨달을 능력이 없습니다. 유대교 경전인 구약, 그리스도교 경전인 신약이 코란에서 명상을 거쳐 깨우쳤다고는 안 하거든요. 어느 순간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예언자고, 그중 으뜸은 예수입니다.”
구약성경은 유태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기록한 책이다. 옛날 옛적 머나먼 고장 셈(Shem)문화권에서 예수가 한 말과 행적이 오늘날 한반도 동방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 신부는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에서 성서를 평면적이 아닌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성서관과 교리관이 많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했다.
-결국 성경에 대한 심층적 공부가 부족해 근본주의 문자주의 해석에 기울어진다는 이야기인가요?
“구약성서, 신약성서엔 장구한 기록의 역사가 있죠. 다 기록이 되고 난 뒤엔 해석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2000년, 유대교는 6000년 전후로 잡거든요. 이런 역사적인 흐름을 연구하는 공부를 일컬어 역사비평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죠. 또 중동 이야기를 그대로 수용한 유럽과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과는 별 상관이 없지요. 그래서 역사 비평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해석학적 성찰을 해야 합니다. 해석학은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입장에서 경전을 재이해하는 거죠. 경전이 남의 나라, 남의 역사 아닌가요. 오늘날 한국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남의 경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게 해석학이죠. 그러니까 역사비평과 해석학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해석학을 할 적에는 문화사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해요. 내가 방금 풍토와 종교가 연관이 된다고 한 이야기도 문화사적인 얘기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의 세계는 생소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전의 현재화가 해석학적 성찰이죠. 한국의 개신교 신도가 천만이 넘고 가톨릭은 오백만이 넘을 정도로 많은데, 역사 비평, 해석학적 성찰을 찾기 힘들어요. 어떻게 신학교육을 시키는지, 목사가 TV 또는 광화문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역사비평, 해석학적 성찰이 전혀 없는 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런 모습을 보면 신학교 교육이 참 잘못됐구나 하고 욕이 절로 나오죠. 하지만 참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 시리즈 인터뷰의 중요한 주제가 다석 류영모인데요. 다석의 성경해석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나는 성서학을 석사학위를 프랑스의 리옹 카톨릭대학에서 했어요. 신학 분야에서는 독일이 가장 앞섰어요. 그래서 어렵게 유럽까지 와서 공부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찾기로 했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사이에 인구 20만 정도의 시골 대학인 뷔르츠부르크 대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서 루돌프 슈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라는 분이 세계 성서학계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박사학위는 독일에서 했죠. 한 7년 걸렸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한 성서 공부는 책상에서 한 것입니다. 석박사를 마치고 나서 성경역사의 현장으로 갔죠. 이스라엘에 가면 사방에서 성서 현장을 발굴합니다. 이런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은 그것을 desk work에 대조해 field work, 즉 현장 공부라고 하죠.
세 나라에서 전부 서양 방법론을 위주로 서양식 공부를 했습니다. 서양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불만이 늘 있었습니다. 동방의 입장에서 성서 풀이를 하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없었어요. 그러다가 다석을 알고 서양식 신학공부는 한 시간도 못한 분이 나름대로 동방신학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성천문화재단에서 12년간 서울시민을 상대로 교양 강좌로 성서특강을 했습니다. 초교파 강의였죠. 유달영 선생 서재에서 보니까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이 여러 권 있었어요. 그 중 한권을 집에 가져가서 읽어보라며 주셨어요. 첫 장을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서당식으로 성경을 읽는 분이 계시는구나! 살아생전 못 뵈었지만 그 분 한테 지금까지 사로잡혀 있는 거죠.”

3형제 신부가 펴낸 <예수 모습 성경미술>책 표지


-다석의 예수 이해가 서구의 기독교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성경 시대는 서기 100년에 끝났고, 그 이후부터는 교리를 만드는 시대가 전개되는데, 가장 첫 번째이고 중요한 교리는 예수 양성(兩性)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325년에 니케아라고 하는 호숫가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중해 주교 350명을 모아서 예수가 사람은 분명한데 아울러 예수에게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 다 있는지에 관해 몇 달 걸리든 토의를 하라고 했죠. 인성과 신성, 즉 예수 양성이죠. 토의를 한 뒤 투표한 결과 주교 350여 명 가운데 열 명을 빼고는 예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신이라고 예수 신성 교리를 확정했어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결정은 어느 쪽으로 해도 된다. 나는 토론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 정작 찬성한 사람들은 모두 황금마차에 태워서 고향으로 보내고, 끝까지 반대하는 10명은 제국의 국법으로 다스려 귀양을 보냈습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정교회든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 양성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이란 말은 요한계 문헌에만 나와요. 신약성서 가운데 요한계 문헌이 5개입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묵시록. 그 가운데 예수는 하느님이다. 예수님에게 극존칭을 칭한 구절은 요한복음에 세 번, 요한일서에 한 번, 딱 네 번입니다. 니케아에 모인 주교들이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는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통과시킨 거죠. 서기 380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성령도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유대교에선 야훼만 하느님이지, 하느님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집트나 로마, 특히 그리스 문화권에선 위대한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봤거든요. 그리스 문화권에서 온 주교들이 ‘별것 아닌 것들도 신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신이 아니면 안 되지’라며 문화사적으로 보아서 그런 접근을 하게 되었죠. 야훼 하느님, 예수 하느님. 성령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셋이 된 거죠. 그러나 이것은 다신교가 아니라고 천명한 것이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입니다. 위(位)라는 관점에선 셋이지만 체(體)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 교도’라는 입장을 1700년째 모든 기독교 종파에서 반복하고 있죠. 거기에 대해 역사 비평적인 성찰을 하는 사례를 거의 못 봤어요.
최근에 제가 들은 바로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종교학 교수 한 분이 예수 신성교리를 전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미국 풍토에선 가능한 일이겠구나. 유럽에서는 그런 얘기를 한다면 어느 교파에서도 내쫓을 겁니다. 유럽은 아직도 그래요. 그런 점에서 미국이 더 자유분방하지요.”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정양모 신부 약력>
-1935년 출생
-1955년 2월~1960년 3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졸업
-1961년 8월~1963년 7월 프랑시 리옹 가톨릭대학교 신학사
-1963년 8월~1964년 7월 프랑스 리옹 가톨릭 대학교 신학석사(교부학)
-1965년 3월~1970년 8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 신학박사(신약성서학)
-1971년 3월~1975년 2월 광주 가톨릭대학교 부교수
-1975년 2월~1976년 5월 경북 청송천주교회 주임신부
-1976년 6월~1978년 8월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연구교수
-1978년 9월~1998년 8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1985년 7월~1993년 7월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소장
-1998년 8월 서강대학교 퇴직·명예교수
-1999년 9월~2001년 6월 성공회대학교 교수·정년 퇴직
-저서 <마르코 복음서> <이스라엘 성지-어제와 오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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