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사찰은 서원을 품고 서원은 사찰을 품다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입력 : 2021-03-19 07:00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강을 건넜다. 이섭대천(利攝大川)이라고 했던가. 큰물을 건넜더니 많은 이익이 있더라는 곳이다. 그래서 땅이름은 이천(利川)이 되었다. 일행과 함께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쌀로 지은 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도자기 가게에서 차를 마셨다. 설봉공원의 번다함이 끝나는 호젓한 자리에 있는 설봉서원을 찾았다. 양지바른 곳에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는지라 아늑한 느낌을 더해준다. 거기서부터 영월암 가는 길은 엄청 가파르다. 하늘이 열릴 무렵 걸음을 멈추니 큰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눈에 들어온다. 이천시내를 굽어보며 저멀리 남한강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천의 진산은 설봉산이다. 이름 그대로 설산이다. 히말라야 산맥(설산)에서 흰눈이 녹아 흘러내린 계곡물이 모여 갠지스강을 이루면서 북부 인도 땅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넉넉함은 다양한 문화를 창출했다. 경기도 이천 설봉에서 흘러내린 물은 여래계곡을 거쳐 설봉호에서 잠시 머물다가 남한강을 향하면서 주변지역을 적셨다. 너른 이천 들판은 ‘임금님표’ 쌀을 비롯한 풍부한 농산물을 생산했다. 하지만 때로는 풍요로움이 지역민에겐 화근이 되기도 한다. 멀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고 밀리는 각축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설봉산성에는 김유신이 통일전략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장소도 있다. 그 무렵 의상대사가 이 지역에 북악사를 창건했다. 설봉산의 옛이름이 북악산이다. 사찰 규모가 만만찮았다고 한다. 1744년 조선중기 영조 때 영월낭규(映月郎奎)대사가 산 중턱에 암자를 중창한 후 영월암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작은 암자가 변란으로 없어진 큰절을 대신하면서 그 역할까지 감당했을 것이다.

설봉산에는 경기 최초서원(1564년)인 설봉서원이 있고 경기 최대 마애불인 영월암이 있다. 어쨌거나 최초와 최대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설봉서원에는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롤모델이라는 고려의 서희(942~998)선생 외 이천을 대표하는 3인의 선비 위패를 모셨다.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지 136년이 지난 후 2007년 새로 복원하였다. 이후 현대적 서원 설립의 본래 목적인 교육기능을 한껏 살렸다. 지자체와 긴밀한 협조 속에서 문화원 형태로 운영한다. 사서오경과 함께 붓글씨 전통예절 다도 등 다양한 강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오후로 빼곡하다. 어린이와 군인의 인성교육까지 위탁받아 진행한다.

서원의 원래 터는 이 자리보다 500m 남짓 떨어져 있는 현재의 현충탑 부지였다고 한다. 유허비만 남겨둔 채 자리를 옮겨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옮긴 터였지만 옛터 못지않게 넓고 양명했다. 하지만 현재 자리에서 또 건물위치 선정 때문에 고심하다가 본래 계획보다 앞쪽으로 약간 내렸다. 왜냐하면 뒤쪽에는 이미 주춧돌을 비롯한 각종 건축 부자재가 노출되어 있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였기 때문이다. 설봉서원 원장선생께서 실무자를 대동하고 직접 안내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셨다. 설명을 듣다말고 주춧돌을 보다가 불현듯 여기가 영월암의 전신이라는 북악사 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간다.

이 터뿐만 아니라 이천지역의 목조 건축물 역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천 관아를 뜯은 재목 가운데 일부가 이천 향교의 건축재료로 사용되었고 향교가 허물어지면서 일부 부재는 1948년 영월암 대웅전을 보수할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관청목재 향교목재 사찰목재가 따로 있겠는가. 원재료는 동일하지만 용도에 따라 그 이름만 달리 불릴 뿐이다. 또 향교 옆에는 오층석탑이 있었다. 이는 향교자리가 원래 절터였음을 시사하는 물증인 셈이다. 하지만 그 탑마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도쿄 시내 오쿠라 호텔 뒤뜰에 있다고 한다. 절집의 탑이 어떤 때는 향교의 조경물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남의 나라 호텔정원 장식물로 바뀌기도 한다. 어쨌거나 문화재는 상황에 따라 주변이 바뀔 수도 있고 아예 옮겨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반드시 역사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또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서방에서 온 어떤 종교는 인근 광주 퇴촌면 천진암을 ‘100여년 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들만의 성지’처럼 설명하고 있다. 불편한 진실이라고 하여 일부러 기록을 은폐하거나 의도적으로 기존 유물을 폐기하는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화파괴 행위라 하겠다.

영월암과 설봉서원은 계곡의 상류와 하류를 각각 지키고 있다. 어쨌거나 같은 골짜기의 물을 마시고 사는 까닭에 서원과 사찰의 친목도 도타웠다. 한 우물을 먹고 사는 마을주민과 진배없는 까닭이다. 같은 도로를 사용하는지라 겨울에는 눈도 함께 쓸어야 한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의 일을 같이 도모할 일도 많았다. 이천 땅에서 서원은 사찰을 품고 사찰은 서원을 품는 흔치않은 광경을 만난 것이다. 덕분에 지나가던 나그네도 융숭한 대접과 함께 서원 역사서와 관계인물에 대한 자료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절은 신사로 인하여 빛나고 신사는 절 때문에 빛나는 모습을 더러 보았다. 나라(奈良)지방의 동대사(東大寺 도다이지)와 인근에 있는 큰 신사인 춘일대사(春日大社가스카타이샤)도 그랬다. 춘일신사 소유의 사슴들은 주로 동대사 입구에서 놀면서 관광객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챈다. 그야말로 동가식 서가숙인 셈이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사슴이 스스로 사찰과 신사 공간을 수시로 오갈 뿐이다.

일정을 마무리한 후 돌아서는 길에 설산영월(雪山映月)을 시제로 삼은 한글주련이 안심당(종무소) 기둥 4개에 4자씩 걸려 있길래 찬찬히 읽었다.

“설산에서 수련하니 마음 달이 밝았도다.”
 

[영월암 안심당, 원철스님 제공] 

 

[설봉서원 뒤쪽의 옛터 주춧돌, 원철스님 제공]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munsu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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