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호 칼럼] ESG는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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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호 모바일벤처기업부 부장
입력 2021-02-0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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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들 사이에서 ESG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ESG는 친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 투명성(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造語)다.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ESG를 경영활동에 접목한다는 게 핵심이다. 가장 큰 특징은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챙긴다는 점이다. 그만큼 기업경영에서 ESG의 우선순위가 높다는 얘기다.

ESG가 한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양극화 문제와 관련이 깊다. 수년 전부터 선진국에선 중산층 축소에 따른 부유층과 빈곤층의 분단이 진행 중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퍼지고 있다.

미국은 주가 상승의 힘으로 국민의 단결력을 강화시켜왔던 나라다. 그러나 인종과 학력, 재력에 따라 주식 보유의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갔다. 주가 상승만으로 사회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격차 확대가 커질수록 시장을 부정하려는 유혹은 강해진다.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초래한 경기침체는 양극화에 기름을 부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지혜가 ESG다. 균형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없는 사람도 자본주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시장의 주체인 기업이 환경(E)과 사회(S) 문제 해결에 눈을 돌렸다.

미국에선 ESG 실천을 위해 주주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한 기업까지 나왔다. 지난해 7월 뉴욕증시에 상장한 모바일 보험회사 레모네이드다. 이 회사는 거래소에 제출한 사업설명서에 ‘이해관계자를 위해서라면 이익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명시했다. 레모네이드는 스스로 주주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와 환경이라는 공익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PBC(Public Benefit Corporation)라는 특수회사로 등록했다. 레모네이드 경영진은 주주 이익과 공익을 함께 추구해야 할 의무를 진다.

프랑스 최대 식품업체 다농은 ‘사명(使命)을 다하는 회사’로 회사 형태를 바꿨다. 회사 정관에 ‘지구의 자연 자원을 보전한다’는 목표도 추가했다. 이 목표가 지켜지는지를 독립된 제3자기관이 감독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에마뉘엘 파베르 CEO는 “다농이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하면,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 결국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1996년 환경헌장을 채택한 다농은 환경과 수자원, 자원재생이용, 농업 지원을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로 삼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프랑스 다농 제공 ]


기업 경영진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자금 투입을 결정할 수 있는 재량을 갖지만, 그 판단은 최종적으로 주주 이익과 연계되어야 한다는 게 그동안의 상식이었다. 90년대 이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뒤 사회공헌활동이 유행처럼 번졌다. 기업과 사회가 공통의 가치를 창조하는 ‘CSV 활동’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ESG를 과거 CSR과 CSV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레모네이드와 다농의 사례는 CSR, CSV를 훨씬 뛰어넘는 조치다. 회사 정관을 고쳐 법적 의무를 부여하고, 거래처와 소비자‧종업원과 같은 이해관계자의 이익까지 추구해야 한다는 목표를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ESG는 기업 경영진이 주주 외에도 이해관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진정성을 갖고 접근하는 경영 방식이다. 회사에 재무적인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기업 평판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게 ESG 경영이다. ESG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챙기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스테이크홀더 캐피털리즘) 시대’에 부합된다.

레모네이드의 상장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고려한 의사결정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 인식하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단기적으로 이익과 배당이 줄어도 장기적으로는 사회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에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는 의미다. ESG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눈이 기업의 형태 자체를 뿌리째 바꾸고 있다.

지배구조(G)와 관련된 움직임도 눈여겨봐야 한다. 뉴욕증권거래소가 나스닥 상장기업에게 여성·흑인과 같은 소수인종, LGBT라 불리는 성소수자를 이사회에 등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해 발표했다. 합당한 이유 없이 등용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상장폐지까지 감수해야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즉각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나스닥’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어 반박했다. 칼럼의 요지는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해 시장을 제공하는 나스닥의 존재 이유와는 거리가 먼 요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스닥의 조치를 뒷받침할 조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글로벌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흑인·라틴·아시아계 이사가 2명 이상 등용된 기업의 3년간 수익률은 12.3%로, 소수인종 이사가 전혀 없는 기업의 수익률 0.5%를 크게 웃돌았다. 나스닥 측은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과 재무결과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사회 구성원의 다양성이 재무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라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실행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나스닥의 시도가 전 세계 증권거래소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돈을 움직이는 기관투자자와 시장을 제공하는 증권거래소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을 요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한국 주식시장도 예외일 순 없다.

국내 기업들은 ESG를 CSR이나 CSV를 조금 더 발전시킨 형태쯤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회에 ESG 위원회를 신설하거나, 이용자의 정보 보호를 선언한다고 해서 ESG를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레모네이드와 다농의 사례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듣기 좋은 소리를 나열해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게 ESG라 착각하는 기업이 투자받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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