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1)] 십자가는 무엇인가, 참죽음이 복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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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01-11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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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석의 재발견(2) - 몸죽얼삶사상(上) 예수처럼 류영모도 죽음으로 깨어나는 길을 갔다

예수는 죽으러 왔다. 성서가 기록한 예수의 위대한 길은 오로지 '죽음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예수의 죽음 외에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모두 죽음을 위한 준비 같은 것이었다. 그 죽음은 신의 명령이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죽는 방법'이었고, 신의 사랑 또한 거기에 있었다. 류영모는 성서 중에서 예수가 죽음을 앞두고 한 기도(요한복음 17장 결별의 기도)를 가장 주목했다. 이것이야 말로 메시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생명을 깨는 것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진리정신을 드러낼 때가 왔다. 진리정신은 죽음을 넘어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야 하고, 죽을 보람으로 죽어야 한다. 예수는 세 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금이 죽을 적기(適機)라고 결정한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 계산은 끝났다."

인간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류영모는 평생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궁구(窮究)했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는 일과 명령받는 일 즉 죽는 일을 결합한 말이다. 생명을 타고난 모든 존재는 생명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라 하는 명령이고 하나는 살았으니 죽으라 하는 명령이다. 생명은 결코 이를 위반할 수 없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없었듯이 죽지 않은 생명도 없었다.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1477?~1576)의 '부활'(1544)'.]



죽음의 명령은 '완전히 소멸하라'는 명령

인간도 생명의 하나인 만큼 태어나고 어김없이 죽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놀라운 점이 있다. 짐승들을 보라. 토끼, 너구리, 호랑이, 개, 비둘기, 오래전 거대한 짐승인 공룡까지. 그들도 생명이었고, 태어났으며 빠짐없이 죽었다. 그 짐승들의 특징은, 자기 생애에서 무엇인가를 추가해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만이 자기 생명을 넘어 후대에게 기억과 기록을 넘겨준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바로 생애를 넘어 무엇인가를 축적해내는 능력의 결과이다. 수십만년을 살아낸 곤충이나 인간보다 더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짐승들은, 거의 같은 수준의 살이를 반복한다. 무엇인가를 남기고 추가하지 못한다.

생명(生命)이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면, 생명은 태어난 자에게 신이 내리는 엄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단순히 '죽으라'는 명령이 아니다. 생을 받으면서 이뤄낸 모든 것을 소멸시키라는 명령이다. 대개 생명은 육신이 소멸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지게 돼 있다. 멸망은 존재가 지닌 것과 이룬 것을 완전하게 소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은 육신이 소멸한 다음에도, 무엇인가가 남아있다. 상속과 유물과 유적과 기술과 기록과 삶의 방식과 문화와 도시와 세계가 남아있다. 이것이 인간의 특별한 점이다. 신은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인간에게는 생명 속에 다른 생명을 넣어주었다. 그 다른 생명이 세상과 지구를 바꿔온 셈이다. 신은 인간에게만은, 생명을 주면서 네 생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다 소멸하고 지우고 버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짐승과 똑같이 갖고 있던 육신만을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신의 은총의 정수다. 왜 그랬을까. 인간에게 신의 출장소인 얼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류영모의 죽음사상이다.

인간은 이런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짐승에게는 없는 그 능력을 지닌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짐승이 진화한 결과 두뇌가 좋아져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두뇌의 진화는 누가 가능케 한 것일까.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는 인간의 특별한 점이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온 결과다. 짐승에게도 일정한 판단이나 감정이 있다. 짐승이 지니고 있는 정(情, 감각적인 판단을 중심으로 한 마음)은 그러나, 인간처럼 뚜렷하게 시간을 초월해 축적되지 않고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인간의 특별한 점을 우린 '영혼'이라 일컫는다. 생명 가운데 그것이 뚜렷이 발휘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영혼의 능력이 전방위적으로 그 근원을 찾아나선 행위가 종교이며 신앙이며 사상이다.

류영모는 말했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몸으로 죽는 연습이 얼로 부활하는 연습이다."

인간만은 '완전소멸'하지 않는다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자. 짐승도 죽고 사람도 죽는다. 짐승은 죽으면서 깨끗이 그 생을 소멸한다. 인간은 죽으면서 육신은 소멸하지만, 죽지 않는 무엇인가를 이어간다. 인류 문명 전체가 인간의 사업이 아니라 신의 사업이라고도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 육신은 죽지만, 인간 속에 깃든 신은 오히려 그때 온전히 깨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인간 속에 깃든 신을 성령이라고 불렀고, 류영모는 얼나(얼의 나)라고 불렀다. 예수가 죽는 시범을 보이러 온 까닭은, 대담하고 용감하게 죽는 무용담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교정해주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죽음은, 몸죽음일 뿐이요 진짜 삶의 시작이라는 역설이었다. 류영모는 이를 '몸이 죽을 때 영생(얼삶)에 이른다'고 표현했다. 이른바 '몸죽얼삶(肉死靈生)'이다. 이것을 류영모의 '죽삶(死生)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죽음 이전의 인간 삶은, 짐승들도 받았던 몸생명을 살아내는 삶이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육신 속에 깃들어서 기적을 일으켜온 '신의 임재(臨在)'인 얼나가 신과 귀일(歸一)하는 대전환의 기적이다. 그러니 아낌없이 죽고 서슴없이 죽으라.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육신의 본능이고 네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얼나의 생각이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 생명이 고통이며 생명까지만 고통이다. 죽음은 그 고통을 초월하여 태어나기 전부터 받았던 사랑의 품 속으로 깃드는 일이다. 이런 '몸얼(肉靈)'의 대전환을 위하여, 예수는 스스로 죽어보였고, 류영모도 그 길을 따라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 맛을 좀 보고 싶다.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내던지고 얼은 들려야 한다. 땅에서 온 몸은 죽어 땅에 떨어지고 위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하느님께로 올리운다. 왜 죽을 것을 겁내는가. 우리에게 빚이 있기 때문이다. 빚이 죄이다. 빚을 다 갚아버리고 원대한 하나에 참례하면 군색할 것 하나도 없다. 원대한 하나에 합쳐지는 것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거다. 병이 든 곳을 꿰매어 삶을 연장하려는 것은 찢어진 옷을 꿰매어 계속 입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밥 먹고 똥 누고 하는 이 일 얼마나 더 해보자고 애쓰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죽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죽는 것이야말로 축하할 일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산다. 죽음을 넘어서 울리는 소리, 그것이 복음(福音)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죽음은 삶의 고개를 넘어선다고 본다. 죽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죽음부터라고 생각한다. 몸나가 죽고서 얼나로 사는 것이다. 몸나는 얼나를 기르기 위한 도시락 같은 것이다. 몸나가 달걀이라면 얼나는 병아리다. 병아리가 다 자라면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류영모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했다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다. 탄생은 이미 실행되었고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그 사이 어딘가 쯤에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다. 모든 생명의 본능은 '죽음에 대한 회피'에 집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을 지속하고 싶으며 죽고 싶지 않다는 생명체들의 소망은, 그러나 시한부로 정해진 죽음 앞에서 예외없이 좌절된다. 차이는 있어도,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다. 생명이란 말은 우리가 숨쉬기를 부여받은 고귀한 특권임에 틀림없지만, 생명이란 글자의 뒤에 있는 명(命)에는 이미 죽을 시간이 기입되어 있다.  불가피한 죽음의 운명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꿈꾸는가. 종교나 사상은 죽음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는가.

류영모의 사상은, 삶보다 죽음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에게 삶은, '죽음'을 위한 치밀하고도 치열한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류영모는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하찮게 여겼다. 세상의 권세나 부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위대한 죽음'을 방해하는 허튼 욕망의 지향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바꿨기 때문이었다. 류영모가 지닌 죽음에 대한 관점을 정확히 보여준 선행자(先行者) 예수에게서 참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서의 예수 행적을 깊이 살핀 결과 류영모는 그 핵심이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삶의 자취들조차도, 유심히 들여다보면 오직 '죽는 순간'을 위한 길이었다. 예수는 신의 메시지를 품고 지상에 등장했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였다. 죽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신의 메시지 전체가 '죽음의 혁명'이었다. 나처럼 죽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최고의 삶이라는 걸, 예수는 온몸으로 웅변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몸으로 형상화되어 후세의 아이콘으로 남은 까닭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신의(神意)임을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류영모가 예수처럼 살고자 한 것과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한 것은, 바로 저 '망설임 없는 죽음의 길'을 행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류영모가 단순히, 죽음 자체를 경배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그토록 감연히 죽고자 했던 것은, 죽음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신과의 합일(合一)이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귀일(歸一)이라는 것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육신이 멸망하는 일이 빚어내는 생물학적인 충격에 전혀 휘둘리지 않은 것은,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다. 류영모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하는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고 죽기를 원했다.

예수가 많은 인간들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공개적으로 죽음을 전시(展示)한 까닭은, 당시 인간권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육신의 극한 고통과 함께 맞는 죽음은 인간이 가장 기피하는 방식의 '생명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예수 죽음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육신의 죽음은 생명을 부여받은 몸의 최후일 뿐이며, 모든 것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의 죽음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이 끊어졌을 때, 얼나(성령)는 일어나 신에게로 안겼다. 그 십자가는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오직 '죽음이란 통과의례'로서만 닿을 수 있는 신과의 완전한 합일은 바로 이런 것이다. 류영모는 평생을 부양한 자기 내부의 얼나가, 육체의 나를 깨뜨리는 파사(破私)를 통해 신과 합쳐지는 '죽음의 맛'을 그렸다. 이 상황을 그는 '깨달음(육신을 깨서 얼나로 닿음)'이라고 불렀다.
 

[다석 류영모 초상[그림=박상덕]]


'부활과 영생' 기적의 미스커뮤니케이션

기독교가 역사상 인류의 가장 방대한 지지를 받게 된 까닭은, 예수가 보여준 '죽음의 시전(示展)'을 철저히 오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예수는 탄생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생명체의 한계를 사는 인간에게 놀라운 기적을 전했다. 인간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지 않는 인간이 가능하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인간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탄생과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그 메시지를 받아든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탄생과 육신의 죽음,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상상했다.

예수가 전한 신의 메시지는, 얼나로 탄생하는 것, 얼나로 죽는 것, 얼나로 재탄생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육신이 살고 싶었던 인간에게는 스스로 듣고 싶은 말들이 들렸고, 얼나로 표현된 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예수는 목숨을 바쳐 이것을 전했다. 류영모는, 이 충격적인 미스커뮤니케이션을 바로잡으려 한 '후지자(後知者)'였다.

오직 얼나로 귀일하는 인간과 신의 믿음을, 사상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였기에, 예수의 죽음이 예수 이후의 인간 중에서 가장 생생하고도 정확한 메시지로 읽혔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믿었으며, 그 죽음이 곧 신의 고결한 사랑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실천하고자 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듯이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반어(反語)는, 인간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영생(永生)이 오직 '얼나의 삶'을 말하는 것임을 후련히 드러낸다. 류영모는 죽지 않았다. 그의 얼나는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 이 '참'을 직면해야 류영모 사상을 만난 것이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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