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의 열린경제] ‘통합의 정치’, 경제도 행복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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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서정대학교 교수(전 YTN대표이사) 사장)
입력 2020-12-22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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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교수] 




영화 ‘쉰들러 리스트’. 1939년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한 도시가 배경이다. 독일인 사업가인 오스카 쉰들러가 강제수용소에서 참혹한 상황에 놓인 유대인들을 구하는 감동적인 실화를 담았다.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비슷한 영화가 있다. 1994년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의 상황을 다룬 ‘호텔 르완다’. 이 영화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당시 르완다는 양대 세력인 투치족과 후투족이 서로 총을 겨눠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나왔다. 평화협정으로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다수 종족인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르완다는 다시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분노한 후투족은 투치족에 복수의 공격을 한다. 이때 최고급 호텔인 밀 콜린스의 지배인 폴 루세사비기나는 100일 동안 호텔로 몰려든 투치족 난민 1200여명을 목숨을 걸고 보호한다.

6년 후인 2000년 봄 투치족 반군 조직인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지휘했던 폴 카가메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RPF가 군사적 승리를 거둔 데 따른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무차별 복수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카가메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범죄에 대한 단죄는 최소화했다. 후투족 최고위급 인사들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넘겼다. 다른 한편으론 ‘우리는 모두 르완다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종을 따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그는 인종차별을 공식적으로 철폐했다. 후투족이니, 투치족이니 하는 단어를 아예 교과서에서 삭제해 버렸다. 같은 인종끼리 단체를 만드는 논의 자체를 불법화했다. 학살 범죄자들은 1만2000여개에 이르는 마을 법정 ‘가가차’에서 다뤘다. 목적은 처벌이 아니었다. 피고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마을공동체가 이들을 끌어안았다. 사회적 통합을 추진한 카가메의 리더십에 따라 르완다는 과거에는 서로 적이었던 후투족과 투치족이 같은 마을에서 살고 직장에서 동료로 일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조너선 테퍼먼은 저서 ‘픽스’에서 당시 르완다가 ‘고통스러운 화해의 길’을 선택했다고 평가하며, “위기를 돌파하려는 지도자들은 절충과 타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번에는 1970년대 초반의 칠레로 가보자. 1973년 9월 쿠데타가 일어난다. 우파 군부정권이 시작됐다. 50대 후반의 장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장기집권을 하며 반대세력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1976년까지 칠레 국민의 1%에 해당하는 13만명이 체포됐다. 이들 중 수천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다른 국가에서 추적을 당하다가 살해된 칠레인도 수백명에 이른다. 피노체트는 임기를 8년 연장한 후 1997년에 다시 8년을 늘리려고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58%의 반대표가 나와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권은 좌파와 중도 정당의 연합체인 ‘콘세르타시온’으로 넘어갔다. 새 정부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먼저 피노체트 정권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처벌이 진행됐다. 피노체트는 살인과 금융 범죄 등 혐의로 기소돼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200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살인과 고문에 책임이 있는 수십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관용과 타협도 같이 이뤄졌다. 1990년 3월에 취임한 파트리시오 아일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경제정책은 좌파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우파 정권이 시행했던 정책을 적지 않게 이어갔다. 세계적 석학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는 <대변동>에서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라는 국가적 정체성이 없었다면 칠레는 정치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남미지역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부유한 국가로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르완다와 칠레의 사례는 ‘과거사’를 처리하고 국가의 앞길을 잡아갈 때, 분열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용서를 선택한 포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대의 상황이 민주주의 종주국이라고 자처해온 미국에서 벌어져 왔다. 주인공은 트럼프 대통령. 그는 경쟁자를 적으로 여기는 혐오의 정치를 일삼았다. 마지막까지 선거 불복 소동을 벌이며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못난 패배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 등 성문화되지 않은 비공식적 규범에 의존한다고 강조하며, 트럼프가 이 규범을 지속해서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트럼프의 정반대 쪽에 있다. 워싱턴은 임기 8년 동안 의회에서 보내오는 법안에 대부분 서명했다. 거부권 행사는 단 두 차례에 불과했다. 워싱턴은 “비록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의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반목의 정치인 트럼프와 협치의 정치인 워싱턴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현실은 이념과 정치적 입장 등의 차이로 끊임없이 갈등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를 짚어보자. 상대를 배척하는 것은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자기 확신 탓이다. 그런데 신념이 그토록 선명할까? 미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이 질문에 도전한다. 그는 ‘이중개념주의’라는 상당히 공감이 가는 관점을 제시한다. 사람의 뇌에는 진보와 보수 가치가 공존하고 있고, 쟁점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수이거나 진보인 사람은 없으며, 사안마다 이 두 가치를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이중성’을 가졌다는 진실에 눈을 뜨게 해준다. 나를 돌아보아 상대를 몇 수 접어줄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실제로 사람이 본질적으로 이렇지 않은가? 인간의 본성을 진단하는 톨스토이의 관점은 정확하다. 그는 소설 <부활>에서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등 사람을 한 가지로 규정하는 틀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사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성질의 싹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 때로는 이런 성질을, 때로는 저런 성질을 발현하며, 여전히 같은 사람이면서도 종종 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이렇듯 인간과 그 사조(思潮)가 갖는 모순과 불완전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나에게는 ‘절대선’, 그리고 상대에게는 ‘절대악’의 기준을 가져다 대면 오판과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이 대목에서 관용과 타협의 접점이 생기고, 유연하게 문제에 대처하는 실용주의의 공간이 열린다. 폴 콜리어 옥스퍼드대학교 교수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깊은 분열의 시대에 이념이 제시한 답은 ‘난폭한 좌우대립’이라며, 진정한 해결책은 ‘실용주의의 차가운 머리’라고 강조한다. 이념의 신조에 부합하느냐가 아니라 실제 효력을 발휘하느냐를 기준으로 정책을 판단하고, 좀 더 겸손한 역할을 하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특히 실용과 관용, 타협의 문화가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안정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국민의 행복도를 높이는 ‘좋은 약’이기 때문이다. 먼저 상대에 대한 인정은 ‘제3의 자본’으로 불리는 사회적 자본의 핵심 요소이다. 사회적 자본은 신뢰, 법 준수 등 규범, 이웃과의 친밀성 같은 네트워크로 구성되는데, 이는 정치 안정 등 사회 통합을 가져와 경제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제로 1970~2000년의 기간 중 56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해외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사회 신뢰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경제성장의 변동 폭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가 들쭉날쭉하지 않고 평탄하게 운영된다는 얘기다. 국내 연구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김정훈 경기연구원 연구위원과 김기호 한국은행 연구위원은 ‘사회자본의 경제안정화 효과’라는 연구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 의회 신뢰도가 낮게 나타나는데 이는 정치 불안으로 인한 경제 변동성의 확대라는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한다. 경제 안정을 위해서 정치가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해소하는 협치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는 게 이들 연구진의 주문이다. 사회적 통합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북유럽 사회는 항상 행복도 순위에서 세계 최상위권에 오르고 있다. ‘세계 행복보고서 2020’은 왜 그런지 다양한 요인을 분석했다. 그중 하나의 요인으로 꼽힌 것은 덴마크와 핀란드, 스웨덴 등 노르딕 국가가 사회적 통합 면에서 전 세계 ‘톱3’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단합하는 공동체성이 ‘행복한 북유럽’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분열된 사회는 국민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건을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만연한 갈등은 사회적 안정도 해치고 이로 인해 국민의 행복감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다.

코로나19의 재확산과 팬데믹의 장기화로 모두가 아프고 힘든 시기이다. 많은 기업이 경영에 차질을 빚고 있다. 특히 자영업자와 취약 계층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코로나 블루’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해외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됐지만 내년 후반이 돼야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 전망이다. 방역의 고삐를 잡고 경기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에 모든 역량이 집중돼야 한다. 경기도 살리고 국민의 행복감도 키워주는 통합과 협치의 정치는 국민적·시대적 요구이다. 마사 누스바움이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들려주는 말은 그래서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밝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협력과 인류애를 가능하게 할 사랑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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