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시진핑·아베·문재인의 마스크와 눈빛 정치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10-31 16:13
2020년 미술이 '코로나'를 소환하다 … 송인의 '37.5'도展, 11월4일 장은선갤러리에서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코로나는 무엇인가

신(神)이 재림한다면, 인간의 형상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바이러스로 오지는 않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색깔이 없다. 인간은 그 공포와 죽음과 주홍글씨의 낙인까지를 연상하며 그 바이러스에 붉은 색을 칠했다. 그 바이러스로 인한 우울과 슬픔과 불안을 생각하며 '코로나 블루'란 말을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에 푸른 색을 칠하기도 했다. 바이러스의 형상을 보면 둥근 모양에 뾰죽한 못(spike)들이 박혀 있는 듯 하다. 돌출된 못들이 둥글게 서있는 모습이 왕관을 닮았다 하여 코로나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

코로나는 인간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코로나는 인간을 알아보는 지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포유류의 몸이 스스로가 서식하고 증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숲속에서 만난 포유류의 몸에 기거하면서 생체의 본능대로 증식을 꾀했다. 그러다 보니 아주 흥미로운 매체(媒體)인 인간에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매체는, 수십억의 같은 종류의 포유류로, 지구를 일정한 의미에서 지배하고 있는 무리들이었다. 더욱 구미를 당겼던 건, 이들이 가장 빈번하게 같은 종류의 포유류를 수시로 접촉하고 있으며 행동반경 또한 놀랄 만큼 넓다는 점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번식 환경과 괜찮은 숙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코로나는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려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개체 하나만을 공략하면, 스스로가 알아서 온 사방에 퍼뜨리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인간 사이의 밀착을 응징하다

신(神)은 생각했다. 더 이상 인간의 문명화를 방치하면, 스스로가 창조한 지구 전체의 자동화된 생명시스템마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이 이토록 빨리, 이토록 대담하게,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의 경계까지 치받아 올라올 줄은 몰랐다. 처음에 뭔가를 기록하고 글자를 만들어낼 때까지는, 그들의 재치와 솜씨를 경탄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기억을 효율적으로 전승하는 기록으로 역사를 만들어 100년의 수명 안에서만 맴돌아야할 지혜들을 자신의 생을 넘어 전달하면서 뜻밖의 문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문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디지털이라는 방식에 적재한 상당한 지식량으로 신의 지혜를 넘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있을 수 없는 위기에까지 온 것이다.

인간에게 일정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이기심의 충돌인 전쟁이나 자연재해, 혹은 천벌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았으나, 지난 날에 활용했던 그런 방법들이 이 지능적인 포유류에게는 잘 먹히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문명을 이룬 바로 그 '뛰어난 점'에 타격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는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러나 움직이며 끝없이 번창하는, 아주 작은 신에 숨을 불어넣어 지구로 보냈다.

이 작은 신이 인간에게 무엇을 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우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밀착을 응징했다. 밀착은 곧 감염이며 전파였다. 모든 인간을 하나하나씩 분리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누가 감염자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죽음을 부를 수 있는 바이러스를 제 몸으로 옮겨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공포에 질린 채 '거리두기'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류를 '개인'으로 떼어놓는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어떤 전쟁이나 폭력이나 위협으로 할 수 있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띄워놓는 일은, 인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전염병 전파의 위험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동'은 전파의 가능성을 늘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이동이 제한되거나 점검을 받는 상황이 생겨났다. 특히 국가간의 이동인 해외여행은 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국가들은 서둘러 다른 나라 국민들의 진입을 막았고, 세계는 저마다 국가 단위로 우선 고립되고, 그 국가 내부의 영역 단위로 고립되고, 마침내 인간 하나하나를 확실하게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도시화와 세계화를 마비시키다

인간을 고립시킨 대사건을 돌이켜 보면, 신이 공격하려 했던 것은 인간의 문명을 폭발적으로 진화시킨, 도시화와 세계화였던 것 같다. 도시의 기능을 일정하게 마비시키고, 도시의 혈액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돌지 못하게 함으로써, 도시의 생태계 전반을 응급상태로 묶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세계로의 이동을 서로 봉쇄하게 만들어놓음으로써 지구 단위로 움직이며 서로를 성장시키던 글로벌 메커니즘을 스톱시켜버렸다. 인간이 자랑스럽게 외치던 세계화는, 저 작은 신의 보이지 않은 테러로 순식간에 고장난 기계가 되어 버렸다. 비행기는 멈춰서고 공항은 먹고 살 게 없어졌다. 관광지는 모두 '저 홀로 아름다운' 슬픈 먼 곳이 되었다.

공동체 속에서의 삶도 파괴됐다. 학교도 마비되고 교회도 마비되고 공연도 사라졌고 영화관도 술집도 댄스홀도 피트니스장도 문을 열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던 때가 언제였던가. 교회의 십자가 아래서 함께 기도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무엇 하나 도시 밖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저마다 외톨이가 되어 '방콕 생활'을 해야 했다. 고립은 우울을 불렀고, 우울은 갑작스런 분노와 이해못할 범죄를 낳기도 했다.

경제는 죽었고, 많은 유통은 택배로 대체되었다. 거리는 한산해졌고 대중교통 또한 마스크를 끼고 침묵한 이용객들이 죽은 듯 지나가는 유령열차가 되었다. 누군가 말을 하면 적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마스크를 벗으면 경찰을 부른다. 모두가 모두의 감시자이며 모두가 모두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아무도 감염되지 않았지만,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로 상대를 대한다.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인간 얼굴의 절반이 사라졌다

인간의 얼굴이 저마다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그 절반은 인간의 고유한 윤곽을 가린 마스크가 덮었다. 어른도 아이도 노인도 젊은 사람도 마스크는 이제 얼굴의 일부가 됐다. 마스크가 얼굴이며, 마스크가 표정이며, 마스크가 무기이며, 마스크가 삶이다. 얼굴이 보여주던 다양한 감정은 마스크 안에서 오직 한 가지 표정, 나는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의심한다는 그 경계심을 표방하며 건조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마스크는 입을 가리고, 코를 가렸다. 입에서 나오는 비말과 코로 들어갈 비말을 막는 것이 주임무다.

신은 인간의 얼굴을 반으로 덮으면서, 인간이 그토록 자부하던 다채로운 감정소통과 언어대화들, 그리고 표정들의 풍성함들을 생략시켜버렸다. 얼굴은 오로지 바이러스의 비말을 쏘아대는 미사일일 뿐이며, 그 비말에 취약한 위태로운 입구를 지닌 것일 뿐이었다. 얼굴에 붙은 것들의 의미가 오직 바이러스의 출구와 입구이기만 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마스크만큼 웅변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마스크에는 어떤 호감도 건조시켜 적의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힘과, 어떤 관심도 뒤틀어 악의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인간을 확진자와 '확찐자'로 양분했다는 우스개는, 사실 무시무시한 말이다. 감염이 확진되면 사회적인 '주홍글씨'가 붙으며, 책임을 기소하는 눈총이 따라오며, 아무리 친한 사람도 일시에 멀어지는 급전직하의 존재가 되는, 최악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 확진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끊고 모든 일상을 끊고 모든 움직임을 끊은 결과가, 그저 살만 붙은 '확찐자'이다. 그 확찐 비만에는 고독과 우울과 스트레스와 생의 의욕을 마비케 하는 절망이 숨어있다.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37.5도, 체온계가 주먹보다 무섭다

37.5도. 모든 식당과 서점이나 가게들, 그리고 사무실에는 체온계가 설치되어 있다. 체온계는 바이러스 인간과 아직 미개봉 인간을 구분하는 '감별' 기계다. 바이러스는 바로 고열(高熱)과 기침으로 나타나며, 이마에 돋아나는 열기는 가장 위험한 신호이다. 물질대사를 통해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는 온혈동물에게, 그 물질대사 외의 이상한 온도의 침입은 그를 육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치명적이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징후다. 자기 온도를 유지한다는 것, 그 온혈을 1도라도 더 내주면 안된다는 것. 체온계를 든 직원이 삼엄한 표정으로 '한번만 돌아가서 더 서 보세요'라고 권하는 말이 저승사자의 말처럼 들리며 식은 땀이 나게 하는 것도, 이 신이 강림한 뒤의 풍경이다.

단일 생체를 움직이는 단일두뇌의 지적 활동 능력을 지능(知能, intelligence)이라고 불러온 관행을 유보한다면, 저 바이러스는 집단지능 혹은 공유지능이라 할 수 있는 '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게 뚜렷하다. 물론 그 지능은 생명체가 지닌 고유의 생존 본능을 수호하고 연장하려는 지적인 결정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그 지적인 결정들이 인간의 삶과 생존 조건에 중대하게 영향을 미칠 때, 우린 그것에게서 '신(神)'을 느끼기도 한다.

대도시와 세계화의 연결 고리들을 공격하며 인간을 순식간에 불뿔이 헤쳐놓은 힘은, 인간 문명에 대한 정교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게 보여지는 점이 있다. 그것들이 목표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인류를 멸절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정상적 삶을 유보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바이러스는 그런 결과에 관해 거의 관심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숙주를 살려두는 지능적 기생(寄生)물체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유용하고 안전한 숙주인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생존기반을 잃는 어리석은 선택을 최소화하고 있다. 숙주를 죽이지 않으면서 최대한 오랫동안 그곳에서 스스로의 번성을 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그것들의 목표로 보인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치명률(致命率)은 낮아지면서 어떤 환경에도 사라지지 않는 변이를 꾸준히 낳으며 증식하는 바이러스가 보일 것이다.

바이러스의 이런 특징은 이 전염병이 한때의 유행으로 머물렀던 과거의 경우와는 달리, 끈질기게 인간과 붙어 살면서 공존하는 긴 시기를 예고하게 된다. 우리 생애에 마스크가 없는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최근 들면서 더 커지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앞으로의 인간 역사는 이 바이러스를 소탕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지만, 그런 과정에서 이 바이러스를 인정하면서 삶의 조건들을 적응하고 개선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가능성도 있다.

작년인 2019년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서 집단 발병한 원인불명의 폐렴은 2020년 1월9일 WHO가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밝히면서 병원체가 확인됐다. 1월21일 중국은 의료진 15명의 확진판정을 밝히면서 사람간 감염 가능성을 확인했다. 1월30일 WHO는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2월 11일 이 병명을 '우한폐렴'에서 '코비드(COVID)19'로 명명했고 한달 뒤인 3월11일엔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이전에 이와 유사한 바이러스들이 '고온'에 취약했던 사실을 들어, 초기에 전문가들은 봄철의 유행으로 그쳤다가 가을에 다시 더 강력해져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갔고, 코로나는 여름에 더욱 기승을 부리며 전세계를 뒤덮었다. 갈수록 확산되는 동안 염기서열의 변이를 일으키며 인간의 방역과 치료를 교란시키고 있다.

'코로나 무의식'이 디폴트로 깔린 인간

감염자의 비말(침방울)이 호흡기나 눈코입의 점막으로 침투되어 전염되는 '감염경로'는 인류 모두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 마스크 품귀 대란으로 '공적 마스크'가 등장하고, 코가 나오게 마스크를 쓰는 '코스크'나 턱에 걸치는 '턱스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마스크 착용과 관련한 시비로 멱살을 잡고 폭행을 행하는 사건도 흔해졌다. 미국의 대통령은 마스크를 안쓰는 고집 때문에 표가 떨어지기도 했고, 최근엔 확진까지 받아 정치적 치명타를 입기도 했다.

감염자가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비말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섞여 타인에게 옮겨가는 '감염거리'가 2m라는 것이 확인되면서, 그 이전엔 부정적이거나 냉담한 태도를 표현하는 말로 쓰이던 '거리두기'가 모든 개인의 행동양식을 간섭하는 '법 위의 법' '모럴 중의 모럴'이 되었다.  2m가 지켜질 수 없는 공간의 많은 활동과 영업은 제재를 받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는 관행도 생겼다.

그리고 우린 이 바이러스와 추운 시절의 독감이 겹치는, 치명적인 이중고(二重苦)의 시절을 앞두고 벌써 떨고 있다. 양대 바이러스가 협공을 하고 시너지를 낼 때, 이미 코로나 하나로 정신적 탈진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 시간을 살아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 코로나는, 인간 영혼으로 깊이 들어와, 내재적인 감정체계를 간섭하는 중대한 상수(常數)가 되어간다. '코로나 무의식'이 본능 속에 디폴트로 깔려 인간의 선택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코로나 무의식은, 인간의 문화와 예술 속에도 어김없이 침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 '신'의 목소리로, 때로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때로는 지구생태계의 위기를 낳은 인간에 대한 응징이나 반격으로, 비교적 공고한 질서에 대한 반역들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읽히고 이해되고 발견되고 음미되고 있을 것이다.
 

[송인의 '37.5도'展 출품작]



'코로나 사피엔스'를 화폭에 소환하다

목원대 출신의 화가 송인(49)은, '코로나 사피엔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화 혹은 변화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인간을 화폭으로 소환했다. 그 '인간'은, 고통과 질식의 시대도 인간 역사의 일부이며 인간 삶의 한 양상이며 변화하는 인간의 한 단층(斷層)임을 읽어낸다. 공포와 죽음에도 미학(美學)은 꽃피어 있고, 우울과 절망에도 미적 카타르시스는 작동을 한다는 걸, 집요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지능적인 바이러스의 의외성에 의해, 끝없이 자기 수정(修正)을 강요당하는 코로나 인간의 초상이다. 인간은 빛깔을 수정당하고, 질감을 수정당하고, 인식을 수정당하고, 움직임을 수정당하고, 삶의 방식을 수정당하고, 감정을 수정당하고, 생각을 수정당하고, 인식을 수정당한다. 송인은 수정테이프와 먹을 이용해 붙이고 떼내고 겹쳐서 그 인간의 '피상화(皮相化)된 내면'을 적발해낸다.

칠흑같은 화면, 모노톤으로 절제된 색채감정, 붉은 돌기가 강조된 코로나 디자인들, 창궐하는 코로나와 조응하는 인물의 표정과 동작, 코로나 무의식으로 직조된 마스크, 코로나를 향한 시선, 코로나에 포위된 호흡, 코로나에 꺼져가는 환자를 보는 의료진의 눈빛 속에 감도는 허무와 공포. 코로나는 붉고 다른 모든 것은 색채를 잃었다. 어둠 속에 하나의 색채만이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한다. 이미지들은 수정테이프의 힘으로, 분말화하고 화석화하여 화면의 어둠 속에 들이박힌다.

삶의 방식을 수정당한 인간을 표현한 '수정테이프'

송인은 마스크를 낀 한중일 지도자를 긴 가로화면에 등장시킨다. 그들의 표정은 두 가지 포인트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마스크를 쓰는 방식이다. 문대통령이 어떻게 쓰고, 시진핑이 어떻게 쓰고, 아베는 왜 벗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마스크언어학, 마스크심리학, 마스크논리학이다. 또 하나는 마스크를 쓰고나면 표정의 요소로 거의 유일하게 남는 '눈'의 표현들이다. 눈길을 어떻게 표현하며 눈빛을 어떻게 드러내며 눈에 담긴 감정이 무언지를 들여다 보게 한다. 이 방식은, 우리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낯선 마스크인간을 만날 때, 그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보티첼리의 비너스, 베르미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여인, 신윤복의 가체(加髢)머리를 올린 미인을, 이 코로나의 한복판으로 소환했다. 비너스와 가체머리는 검은 마스크를 끼었고, 모나리자는 흰 마스크를 끼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공간 속에 들어가 있는 진주 귀고리 소녀는 마스크를 끼지도 않았고 모노톤의 얼굴에 공포에 질린 눈은 튀어나올 듯 하고 검은 입술이 벌어져 무슨 소리를 내는 듯 하다.

명화 속의 인물들을 코로나 속에 배치한 것은 지금의 코로나를 낯설게 하는 의도(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코로나로 지친 일상에 던지는 농담 아니면 위로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일 수도 있지만, 이 시대를 다빈치나 보티첼리나, 베르미어, 신윤복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의 그림이 이렇게 무의식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는지도 모른다. 미의식의 심각한 확장이랄까 예술성의 전복(轉覆)을 꾀하는 일종의 새타이어(Satire)다.

인간이 균같고, 코로나는 생명같은

폭력의 현실에 노출된 인간들의 초상을 돋을새겨온 작가 송인의 이번 전시는 인간의 탐욕과 방심이 부른 바이러스의 역습이란 폭력을, 저 음울한 인간들의 표정으로 찍어내고 있다. 그리고 바이러스와 인간의 일종의 역전(逆轉)을, 슬쩍 흩어지는 메시지로 뿌려놓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인간은 소립자가 되고 으깨진 망점이 되어 흩어지는 먼지가 되고 분열하는 픽셀이 되었다. 인간이 균(菌)이 된 것이다. 반면 코로나는 어떤가. 구체적인 형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압도하는 색깔로 시선의 중심으로 폭주하고 있다. 코로나는 살아있고, 인간은 먼지처럼 화면의 어둠에 묻어있다. 인간이 코로나이고 코로나가 인간인, 의식의 반전이 절망의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가 인간을 소환한 듯한 화면, 꺼진 어둠 속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 가득하다는 것이 문득 소름끼치게 느껴진다.
 

[송인의 '37.5도'展 포스터.]



이 전시의 타이틀은 <37.5도, 마지노선>이다. 인간의 정상체온 기준은 37.4도까지로 본다. 37.5도는 미열이 있는 것이다. 감염이 의심되는 징후의 시작이 바로, 그 체온이다. 38~39도가 되면 고열로 간주한다. 마지노선이란 말을 붙인 건, 인간이 지켜야 하는 최후선이다. 사실은 미열이 시작되는 선이기도 하다. 코로나의 발생확률이 가장 높은 증상은 발열(發熱, 98%)이고, 그 다음이 기침(76%)이다. 타이틀은, 체온의 사투(死鬪)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 타이틀은 당신의 이마에 문득 들이대는 '체온계' 같은 질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몇 도인가를 묻는다.

이 전시(송인 초대展)는 오는 4일(수)부터 21일(토)까지 장은선 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서 볼 수 있다. 코로나 일상 속의 코로나 사피엔스, 코로나 세계 속에서 코로나 무의식으로 눈뜨고 숨쉬는 이 삶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재앙의 방향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우린 코로나를 통해 어떤 인류로 바뀌어갈 것인지 문득 멈춰 서서 한번 생각해보는, 값진 나들이가 아닐까. '스산해지는 11월에 걸맞는 문제적이고 실존적인 미학산책'이 될 수도 있으리라.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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