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휘 칼럼] 미국의 경제번영네트워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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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휘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20-06-1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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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휘 교수





무역전쟁이 발발한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경제번영네트워크(EPN·Economic Prosperity Network)를 추진하고 있다. 작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4차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에서 EPN 구상을 소개했던 키스 크라크 미국 국무부 차관은 지난 달 20일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했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크라크 차관은 이달 5일 이태호 외교부 차관과의 통화에서도 우리나라의 EPN 참여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미국의 압박 수위가 점점 강화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참여 여부에 대한 논의 자체를 회피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보복 가능성 때문이다. 2017년 7월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은 우리나라에 다양한 경제제재를 부과하였다. 우리나라가 중국이 반대하는 미국의 대외전략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경우, 중국은 2017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제재를 도입할 것이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무역이 감소하고 경제성장률이 급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추가 경제제재는 우리 경제에 대형 악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정부가 EPN에 대한 결정을 계속 미룰 수만은 없는 일이다. 미·중 패권 경쟁은 시간이 지나가면 사라지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최소 3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EPN에 대한 대응책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결정자의 발언보다는 실물경제의 흐름을 더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먼저 EPN이 실현될 수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EPN의 핵심은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다. 과연 미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호주, 인도, 일본, 뉴질랜드, 베트남 등과 함께 중국이 없는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으로 부상한 지 20년이 넘었기 때문에, 중국을 배제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지난할 수밖에 없다.

반중 정서가 초당적 합의로 수렴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중국과의 탈동조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자동차산업 대표 주자로 부상한 테슬라는 2019년 상하이에 연 25만대 생산이 가능한 기가팩토리를 건설하였다. 올해 1월 신차 인도를 시작한 테슬라는 4월에 25만대를 더 생산할 수 있는 2단계 공사에 착수하였다. 대중 의존도를 낮추려고 베트남과 인도로 위탁생산 거점을 이전하려는 애플도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베트남에서 무선 이어폰 에어팟을 만드는 기업은 대만의 폭스콘이 아니라 중국의 리쉰정밀(立訊精密·Luxshare)이다. 즉, 애플의 에어팟은 지리적으로는 중국을 벗어났지만 공급망에서는 여전히 중국의 품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4월 중국이 멕시코와 캐나다를 제치고 미국의 최대 교역국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둘째로 따져 볼 점은 EPN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일관성이다. 애플과 테슬라의 사례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기업에는 탈중국을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있다. 만약 미국이 자국 기업은 빼고 동맹국 기업에만 탈중국을 요구한다면, 이는 전형적인 이중 기준과 다름없다.

미국이 EPN을 추진하려면, 자국 기업부터 먼저 솔선수범해 중국 시장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동맹국이 EPN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미국은 보호무역 조치를 철폐해야 한다. 중국에 수출을 하지 못하게 된 외국 기업에 새로운 판로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EPN을 옹호할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EPN은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에 특혜를 주기 위한 미국 우선주의의 일환으로 간주될 것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 여러 나라는 유럽 기업만 중국에서 철수할 경우 미국 기업이 중국 시장 점유율을 손쉽게 확대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EPN에 대한 미국의 의지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 EPN의 기본 목적인 중국 견제는 오마바 행정부가 추진했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에 잘 반영되어 있었다. 미국 의회가 TPP를 비준했다면, EPN을 따로 추진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TPP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런 전례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EPN을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와 인종 차별 시위로 인한 국내정치적 곤경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는 약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3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많은 사림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머나먼 땅에서 벌어지는 오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미국 군의 의무가 아니다”고 선언하였다. 즉,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담당해왔던 세계경찰의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동맹국의 미국에 대한 신뢰는 강화되기 어렵다. 독일과 영국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G 사업에 미국이 제재하고 있는 화웨이의 참여를 허용하였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와 함께 네트워크인 파이브 아이스에 참여하고 있는 뉴질랜드는 홍콩 인권법 제정에 대해 중국을 비판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미국이 동맹국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EPN을 일방적으로 추진한다면, 참여하는 국가의 수도 늘어나지 않을 것이며 협력의 강도와 범위도 제한적일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협상에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미국 정부의 명확한 답변을 요구해야 한다. 이 답변에 대한 평가를 통해 EPN을 지지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전략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안보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의 국가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미 여러 동맹국들은 자국의 국가이익과 상충할 때마다 미국에 반대하거나 지지를 유보하였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처럼 미국이 자국의 국가이익을 동맹에 우선하는 한, 우리나라가 동맹을 위해 우리의 국가이익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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