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퍼스트 코리아!] 미중 패권전쟁의 종국엔 화폐전쟁...왜 기축통화를 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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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훈 기자
입력 2020-06-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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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스페인부터 미국까지...기축통화 계보는

[아주경제 미술팀]

중국이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위안화의 국제화 진입에 속도를 내는 결정적인 이유는 미·중 패권전쟁의 종국에 화폐전쟁이 있기 때문이다. 기축통화는 국제 무역에 쓰이는 결제 화폐란 원론적인 기능을 넘어 글로벌 경제질서를 좌우하는 궁극의 무기이다. 

실제로 위안화가 기축통화로 올라설 경우, 재정·통화정책 측면에서 다양한 효과가 발생한다.

먼저 재정 측면에서는 세뇨리지(화폐 액면가격에서 제조비용을 뺀 화폐주조 차익) 효과를 통한 이익 창출이 가능하다. 통화 정책에서는 환율 변동에 대한 위험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외환위기 상황에도 손쉽게 대처할 수 있다. 앞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이 단행했던 양적완화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제사회에서 ‘기축통화’ 보유 국가가 갖는 영향력은 역사를 통해서도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기축통화의 상징성은 크게 달러화를 기점으로 한 ‘전과 후’로 나뉜다.

1500년대에는 스페인 페소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했다. 식민지에서 들여온 은과 금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한 덕분이다. 1500년부터 한 세기 동안 스페인에 유입된 금의 양은 15만㎏, 은은 740만㎏에 달한다.

16세기 말 스페인 무적함대가 침몰한 뒤에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의 길더화가 국제통화로 떠올랐다. 이후 프랑스의 프랑화가 잠시 기축통화의 역할을 담당했다.

다음은 영국 파운드화의 시대였다. 파운드화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기축통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국은 파운드화를 금에 연계하는 금본위제를 도입했고, 세계 각국은 파운드화를 교역 시 결제 용도로 사용했다. 19세기 후반에 파운드화가 세계 교역 결제통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달했다. 그러나 파운드화의 시대 역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떠오른 건 세계 2차대전이 완전히 막을 내린 1945년이다. 1944년 44개국은 미국 뉴헴프셔주(州) 브레턴 우즈에 모여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삼는 금환본위제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금 1온스는 미국 35달러에 고정됐다. 이듬해 국제적으로 달러화의 사용량이 파운드화를 앞섰다. 1940년까지 세계 각국이 보유한 파운드 양이 달러의 두 배에 달했던 점을 고려했을 때 빠른 성장세다.

이후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화폐를 금으로 교환하는 것) 정지를 선언한다. 당시 발생했던 베트남전 군비조달 등으로 달러 가치가 하락했던 게 주된 이유다. 그러나 이후에도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의 가치를 지속한다. 그에 앞서 약 30년간 기축통화로 통용되면서, 각국의 외환 보유가 대부분 달러로 이뤄진 덕분이다. 이 때문에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존재하지 않고 가치가 하락할 경우 대부분의 국가들이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물론 그 사이 일본 ‘엔화’와 유럽연합(EU) '유로화‘ 등의 도전이 있었지만 매번 달러화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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