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오대산 그리고 가야산에서 전나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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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0-05-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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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오대산 그리고 가야산에서 전나무를 만나다
 


꽃진 자리에 잎이 돋는가 했더니 어느 새 푸르름을 더해가는 시절이다. 도로를 따라 달리며 바라보는 한강은 이미 봄물빛이 바랬고 어느 새 여름색으로 바뀌어간다. 코로나19로 인한 ‘방콕’이 일상화된 지도 서너달이 지났다. “답답할테니 오대산(강원)으로 바람쐬러 오라”는 교구장 스님의 배려 깊은 초청을 받은 몇 명이 함께 길을 나섰다. 이틀 전에는 해인사에 회의하러 오라는 업무전화를 받고 혼자 가야산(경남)을 다녀왔다. 사흘 사이에 하루 걸러 가야산과 오대산을 다녀온 셈이다. 역시 회의하러 가는 것보다는 놀러 가는 일이 더 즐겁다. 일하기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쉬기 위해서 일한다는 ‘워라밸’이 대세인지라 워크홀릭(일중독)은 이제 더 이상 현대인에게 미덕은 아니다.
 

[사진= 원철스님 제공] 


큼직한 선돌에 새겨진 ‘오대성지(五臺聖地)’라는 굵은 먹물글씨가 나타났다. 서예가 남천 모찬원(南川 牟賛源·1916~?) 선생 글씨라고 삼척 천은사에 머물고 있는 도반이 문자로 답장을 주었다. 절집 몇 군데 당신의 현판글씨가 남아 있지만 이력과 행적을 따로 드러내지 않는, ‘오직 작품으로만 말하는’ 은자(隱者) 스타일인 듯하다. 작품보다는 지위를 먼저 보는 세태에 대한 경종이 될 법하다. 가야산 입구의 ‘해인성지(海印聖地)’ 글씨는 성철 스님(1912~1993) 작품이다. 남천 선생은 제대로 은둔했고, 성철 스님은 은둔했지만 그로 인하여 오히려 더 드러나게 되었다. 살펴보니 두 어른의 나이 차이는 4살에 불과한 거의 동시대 인물이다.

어쨌거나 두 산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풍수가들은 오대산은 육산(肉山)이고 가야산은 골산(骨山)이라고 부른다. 오대산은 평평한 흙산이고 가야산은 바위로 울퉁불퉁하다. 육산은 품이 넉넉하고 골산은 기상이 장대하다. 산이 많은 강원도에도 흙산이 있고 평야가 많은 경남에도 돌산은 있기 마련이다. 강함 속에는 부드러움이 빛나기 마련이고 부드러움 속에는 강함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두 산이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리라.

오대산이란 이름은 중국 하북(河北)성에 위치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성지로 유명한 오대산에서 기원한다. 가야산(伽倻山)이란 명칭은 붓다가야(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 북부지방에서 탄생한 불교가 동아시아로 퍼지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문화현상이다. 특히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이름은 교세를 따라 이동하기 마련이다. 스페인의 대표적 성지인 산티아고 명칭은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가 되었고, 아르헨티나·쿠바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다. 심지어 미국 샌디에이고 역시 연원은 동일하다.

오대산에는 선재길이 있고 가야산에는 소리길이 있다. 모두 올레길 걷기 열풍을 따라 옛길을 복원한 것이다. 길만 있다면 전국에 산재한 여느 둘레길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다. 조선의 세조(世祖·1417~1468) 임금도 선재길 계곡을 걸었다. 땀이 났다. 그렇잖아도 피부병으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땀까지 차니 가려움증이 더욱 심해졌다. 할 수 없이 계곡에서 목욕을 하게 된다. 그때 문수보살이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 등을 씻어준다. 이후 피부병은 거짓말같이 나았다.

소리길은 신라 때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857~?) 선생의 은둔처이다. 계곡의 물소리로 귀를 막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시비(是非)소리를 산을 병품 삼아 거부했다. 두 사람의 구원 방식은 정반대다. 세조는 동자와의 만남으로 인해 고질병이 나았고, 최치원은 스스로 산골짜기에 가둠으로써 단절을 통해 번뇌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구원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동일한 방식의 구원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은둔한 고운 선생은 가끔 소리길을 따라 해인사를 다녀오곤 했다. 그 길은 지팡이가 있어야 할 만큼 가파르다. 재료는 전나무였다. 어느 날 문득 그 지팡이마저 무겁고 귀찮은지라 무심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입구 언덕에 꽂듯이 버렸다. 빈손으로 내려오는 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남겨진 지팡이는 이듬해 싹이 났고 해를 거듭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이후 최치원의 지팡이나무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형 전나무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전설만 남았다.

오대산 입구 역시 전나무가 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그 길 따라 ‘코로나 은둔’에 지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쓴 채 찾아와서 걷기를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고 있다. 전나무는 오대산과 가야산에서 은둔이라는 존재 방식을 통해 역설적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원철스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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