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우리 형님의 얼굴수염은 누구를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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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0-01-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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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우리 형님의 얼굴수염은 누구를 닮았는가



 

[청계김진 진영]




미공개 진영을 인사동 표구점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는 진영(眞影)의 후손과 외손도 함께 자리했다. 설사 오백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뭔가 닮은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곁에 있는 친인척의 얼굴까지 진영과 비교하며 찬찬히 살폈다. 학봉종가에서 의뢰받은 김성일 (1538~1593)선생 진영을 그리기 위해 김호석 화백 역시 친인척들이 모이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사당이나 지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영혼없는 진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진영’을 위한 밑작업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동지역에서 자생하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사용하여 현장감을 더욱 살리려는 노력까지 더해졌다.

진영의 주인공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선비로써 임진란 때 의병을 모집하려 다니던 비장한 모습을 담기 위해 상반신만 그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신세계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는 일이다. 특히 얼굴표정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옷(철릭:위아래가 붙은 옷. 그 위에 갑옷을 입는다고 한다)도 색깔을 넣지않고 먹선으로 처리했다. 머리에 쓰는 갓(笠) 역시 전쟁 중이므로 단순한 장식없는 갓끈으로 처리하여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강조했다. 경북 안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 유천 이동익(攸川 李東益 1940~)선생의 화기(畵記) 역시 최소한의 글자수와 작은 글씨체로 써서 얼굴이 돋보이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어쨋거나 진영을 그리면서 현재 후손의 모습을 추적하여 오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했다. 다행이도 학봉의 부친인 청계 김진(靑溪 金璡1500~1580)선생의 진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1572년도 작품으로 73세 때 모습이다. 가까운 조상의 모습이 진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하기는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낡은 그림이라 표정묘사에는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어쨋거나 이 그림은 살아있을 때 화가에게 직접 진영을 부탁하여 완성한 후 집안의 정자인 선유정(仙遊亭) 남쪽 벽에 걸어두고서 감상했다고 한다. 자기진영을 가까이 두고 수시로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청계선생은 자녀교육에 혼신을 다한 어른이다. 47세(그 때 학봉 나이는 8세였다)되던 해 아내와 사별했다. 하지만 새로 부인을 들이지 않고 혼자 5남3녀를 키웠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넷째아들인 학봉의 기록에 남아있을 정도로 부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다. 대부분 어리아이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않는 일이 없었다.”

자녀교육에 올인한 이유 역시 다분히 전설적이다. 과거를 보려가는 길에 문경새재 부근에서 어떤 기인에게 “신수를 보아하니 생(生)참판보다는 증(贈)판서가 되는게 더 낫겠구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부연하자면 생참판은 살아서 자기가 참판이 되는 것이며 증판서는 죽어서 판서직위를 추존받는 일이다. 관상가의 말대로라면 후손을 잘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 말에 필이 꽃혔는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자식교육에 전념했다. 어쨋거나 다섯명의 아들을 모두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여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으로 불리었다. 또 많은 전답을 개간하여 집안의 경제적 토대마련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처럼 제비집에서 새끼제비가 떨어져 죽는 모습을 보고 자기새끼가 아니라서 밀어냈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새장가를 들지 않았다는 뒷담화 역시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닐 터이다.

어쨋거나 남아있는 옛 청계진영이 오백년 후 학봉진영을 만드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굴모습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진영제작이라는 유산까지 남긴 셈이다. 두 영정을 바라보면서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선생이 황해도 금천 연암협(燕巖峽)에서 돌아가신 형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 남겨놓은 시가 참으로 어울리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님 얼굴수염 누구를 닮았던고(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나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이 그리우면 어디에서 볼 것인가(今日思兄何處見)
두건쓰고 옷입고 나가 냇물에 비친 내얼굴을 봐야겠네(自將巾袂映溪行
)

 

[학봉 김성일 진영]

 

[학봉 김성일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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